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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19] 김정완 매일유업 부회장

18일 오전 5시30분. 김정완(52) 매일유업 부회장이 일주일간 싱가포르와 미국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시간이다. 그는 곧장 서울 운니동에 있는 회사로 출근해 오전 내내 그동안 쌓인 보고서를 검토했다고 한다. 같은 날 인터뷰에서 피곤하지 않으냐는 첫 인사에 김 부회장은 "요즘은 일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며 특유의 아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해외 사업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미국에 요구르트 공장을 지을 계획"이란 게 일성이었다. "내년께 현지에 요구르트 공장을 지을 생각이다. 사실 지난해부터 추진한 프로젝트인데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차질이 생겼다. 조만간 실현에 옮길 것이다." -요구르트는 유럽에서 처음 나온 제품이다. 해외에서 승부하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일본 야쿠르트는 세계 곳곳에 진출해 탁월한 마케팅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우리도 65mL 작은 병 안에 건강 기능을 담으면 승산이 있다." 얘기가 나온 김에 다른 해외 사업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내년에 중국 칭다오에 요구르트 공장을 세운다. 믿을 만한 현지 파트너를 만났다. 자회사인 ㈜제로투세븐은 베트남에서 영.유아복 사업을 추진 중이다." 매일유업은 1969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진 한국낙농가공이 모태. 회사가 부실해지자 정부는 이태 뒤 함경남도 이원 출신의 기업가였던 고 김복용 회장에게 인수를 권유했다. 유제품 일체를 미군에 의지하던 시절 낙농업 진출은 도박과도 같았다. 당시 51세였던 김 회장은 정부가 떠넘기듯 맡긴 이 회사를 한국 굴지의 유가공업체로 키워냈다. 지난해 매출은 7448억원. 치즈 제조업체인 ㈜상하 ㈜제로투세븐 와인 유통을 하는 래뱅드매일 등 계열사 매출까지 합치면 9338억원에 달한다. -올해 실적 전망을 하면. "예상보다 훨씬 좋을 것 같다. 목표했던 8300억원대 매출 달성은 무난할 것이다. 현재 프리미엄 분유 '앱솔루트 궁'과 떠먹는 요구르트 '바이오거트 퓨어' '매일우유 저지방&칼슘' 등 1등 브랜드가 5개다. 이를 2013년까지 8개로 늘리고 싶다." 회사 측은 올해 매일유업 및 3개 계열사 매출이 1조1000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실적이 좋은 비결은. "과거엔 그 많은 브랜드를 모두 성공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사업을 벌여놓고 부진한 사업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실수였다. 지금은 제품 가짓수를 최대한 줄이는 중이다. 어떨 땐 브랜드 매니저에게 '그 브랜드는 왜 있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가치가 없으면 접어야 한다. 그래서 가장 신경 쓰는 것은 퀄리티(품질)다. 내년엔 요구르트 전 제품을 재론칭한다. 공장 설계.용기 디자인 등을 과감하게 바꿀 것이다." -2012년까지 그룹 매출 1조6000억원을 이루겠다고 했는데. "핵심은 유가공 사업이다. 사실 처음에는 종합식품 사업으로 회사를 확장하려고 했다. 생각을 잘못한 것이다. 1년 보관할 수 있는 상품은 우리가 잘하는 게 아니더라. 우리 강점은 '신선함'에 있다. 슬로건도 '아침마다 신선한 제품을 공급하는 회사'로 정했다. 상품은 우유도 있지만 주스도 두유도 있다. 그러나 외형이 중요한 게 아니다. 매출이 줄어들더라도 정말 좋은 1등 브랜드를 갖고 있다면 당연히 이 선택을 할 것이다. 차근차근 시장 리더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김 부회장은 "치즈 사업을 하는 ㈜상하를 합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원료를 수입해야 하는 치즈 사업은 환율 움직임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마케팅에 전념하기 어려웠는데 큰 덩어리(합병)로 묶어서 브랜드를 키울 생각이다." -최근 매일유업이 선전하는 데는 '김연아 효과'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내부 아이디어로 채택돼 지난해 봄부터 김연아 선수를 모델로 쓰고 있다. 김연아의 신선한 이미지가 우리와 맞는다. 그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 광고를 만들어와 다시 만들라고 한 적도 있다. 세계적인 스타가 된 만큼 놀림감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스타 대우를 해주고 싶다. 김연아가 승리해도 좋고 아니어도 괜찮다. 그 이미지를 공유하고 싶다." -먼저 창업(64년)한 라이벌 업체 남양유업을 어떻게 평가하나. "남양은 마케팅을 잘하는 회사다. 배운 게 배울 게 많으니 존경할 수 밖에 없다. 시장에서 서로 좋은 경쟁을 하고 있다. 우유나 조제분유 같은 제품은 계속 겹치겠지만 10년 20년 뒤 서로 가는 길이 달라지지 않겠나." 김 부회장에게 '다른 방향'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매일 상하목장'이라는 유기농 우유 얘기를 꺼냈다. 올해에만 170억원어치(750mL 기준 900만개)가 팔린 히트상품이다. 김 부회장이 사내에서 유기농 제품 출시를 제안한 것은 2007년이다. 사업성이 떨어진다며 모든 임원이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기농이 별건가. 옛날에 농사짓던 대로 하면 된다"며 사업을 밀어붙였다. ㈜상하의 치즈 공장이 있는 전북 고창으로 달려갔다. 그가 성공 요건으로 주목한 것은 가격이다. 값을 낮추지 않고는 유기농 제품이 성공할 수 없다고 여겨서다. "처음엔 소비자 가격을 3000원(750mL들이 기준)에 맞추려고 했다. 젖소 사육 농가를 찾아다니며 원유를 무조건 전량 구매할 테니 가격 높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결국 3900원에 내놓았지만 경쟁 유기농 제품에 비하면 20~30% 저렴한 것이다. 요즘 하루 17톤 정도 팔린다. 시장 점유율은 50%다. 수년 안에 하루 50~100톤을 팔 수 있을 것이다. 잘 될 아이템은 많다. (웃으면서) 언제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김 부회장의 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고창 일대를 지역민과 함께하는 유기농 마을로 육성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고창군 상하면의 상하는 하늘과 땅이 닿은 곳이라는 뜻이란다. 따뜻하면서 청정하다. 소 키우기에도 좋은 곳이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지명을 따서 지었다. 이 일대 목장을 체험하고 유기농 쌀.계란 등을 구입할 수 있는 유기농 마을을 조성할 계획이다. 가족 단위 체험.교육 프로그램도 구상 중이다. 이렇게 되는 데 2년쯤 걸리지 않을까." -벤치마킹하는 모델이 있나. "일본 나고야 인근의 모쿠모쿠 목장을 자주 찾는다. 체험 프로그램 운영과 농산품 판매를 통해 연 500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곳이다. 김완주 전북도지사를 모시고 간 적도 있다. 우리도 농민과 기업 지방자치단체가 손을 잡으면 깜짝 놀랄 유기농 단지를 성공시킬 수 있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실현되든 안 되든 나는 진정 열심히 하려고 한다." WHO? 1957년 서울생. 고 김복용(1920~2006) 매일유업 창업주의 장남. 보성고와 경희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NC웨슬리 안대 대학원에 다니다 86년 부친의 부름을 받고 귀국해 매일유업체 입사, 상무·부사장을 거쳐 97년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2006년 1월 김복용 회장이 작고한 뒤 회사 경영을 책임져 왔다. 취미를 묻자 “뭐든 새로운 것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다”며 최근 2~3년간은 예술품에 빠져 있다고. 외식사업을 활발히 벌이는 것과 관련해선 미식가는 아니지만 특별한 미각을 가진 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고 김 회장의 차남인 정석(50)씨는 식자재 납품업체인 ㈜복원을, 삼남인 정민(47)씨는 영유아 관련 제품 공급업체인 ㈜제로투세븐을 경영하고 있다. 차진용.이상재 기자

2009-12-24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18] 이희상 운산그룹 회장

이희상(64) 운산그룹 회장의 홀인원 기념 와인이었다. 잠시 후 시작된 이 회장과의 인터뷰는 골프 얘기로 출발했다. 이 회장은 재계에서 알아주는 골퍼다. 최고 스코어는 69타로 홀인원을 네 번이나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특유의 골프 경영론을 설파했다. 요컨대 목표를 분명하게, 과감하게 그리고 멀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골프를 인생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홀 컵 안에 넣으려고 스윙하는 것과 온그린(골프에서 공을 그린 위에 올리는 것) 하면 만족한다는 심정으로 스윙하는 것, 당연히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세도, 방향도 신중해지게 마련이다. 또 드라이브 샷을 잘했다고 해서 세컨드 샷이 잘 맞는 게 아니다. 첫 홀을 잘 쳤다고 해서 18번 홀까지 운이 좋은 것도 아니다. 선수들 시합도 마찬가지다. 첫날 좋았다고 마지막 날까지 가는 게 아니다. 경기는 후반이, 마지막 날이 좋아야 한다. 목표를 보다 ‘멀리’ 두어야 한다. 의지를 가져야 기회도 오는 법이다.” 요즘 가장 신경 쓰는 분야는. "일단은 안정적인 곡물자원 개발에 포커스를 맞췄다. 장기적으로 보고 있다. 지구온난화 현상이 심해지면서 농사 작황 예측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여기에다 곡물이 금융 상품화하면서 '돈 장사'가 됐다. 쌀이 남아돌아서 그렇지 한국은 심각한 식량 부족 국가다. 자급률이 30%도 되지 않는다. 안정적인 식량자원 확보는 국가적인 숙제다. 우리도 나름 노력하고 있다. (해외 자원 확보를 통해) 식량 자급을 이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일념이다." -식량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나. "중국 산둥성에서 고구마 농사를 지은 적도 있다. 비록 실패했지만 값진 경험이었다. 2007년부터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유기농 밀 농사도 짓고 있다. 올해 300톤쯤 들여올 예정이다. 캄보디아 바탐방 지역엔 옥수수 건조장을 건설 중이다. 중장기적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지도 검토하고 있다." 운산그룹은 1956년 고 이용구 회장이 창업한 호남제분(현 한국제분)이 모태다. 2000년 동아제분(현 동아원)을 인수하면서 제분업계의 강자로 올라섰다. 와인 유통 회사인 나라식품 애완견.고양이 사료 업체인 대산물산 유기농 체인 사업을 하는 해가온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올해 예상되는 그룹 매출은 7000억원대. 주력인 제분사업에선 시장 점유율 26%로 대한제분.CJ제일제당 등과 빅3를 이루고 있다. 지난달 사료회사인 SCF(옛 신촌사료)와 동아제분을 합병해 동아원을 만들었다. 그룹 이름인 운산은 고 이 회장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제분업의 특징은 무엇인가. "제분업체의 수익은 국제 곡물 시세와 환율 움직임에 좌우된다. 주원료인 원맥 대부분을 미국.호주.캐나다 등 밀 생산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당시 달러당 원화 가치가 2000원에 육박해 견디기 어려웠다. 게다가 톤당 200달러 정도됐던 원맥 가격이 236달러로 10% 이상 올랐다." -9월부터 밀가루 값을 내렸다. "밀가루는 중산층.서민이 즐겨 찾는 품목이다 보니 가격 움직임에 민감하다. 지난해 갑자기 곡물가격 급등에 원화 가치 하락이라는 이중고를 만났지만 쉽게 값을 올리지 못했다. 올 들어 곡물가격이 떨어지고 환율도 안정돼 9월부터 평균 9% 내릴 수 있었다. 밀가루는 지난해부터 발표하고 있는 MB 물가지수 52개 항목 가운데 19.5%나 값을 내린 '모범 품목'이다." -지난달 동아제분과 SCF를 합병해 동아원을 출범시켰다. 현재 4000억원대인 이 회사 매출을 2015년까지 1조원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했는데. "글로벌 전략에 포커스를 맞춰 나온 목표치다. 해외 자원 개발이 핵심으로 4~5년 전부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도 최근 2년간 연중 200일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다. 최근 들어 분위기가 좋다. 정부도 자원 개발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전문가 구하기도 한결 수월해지면서 사업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캄보디아에선 옥수수 유통을 중국에선 사료 사업을 해볼 계획이다. 2015년까지 해외 부문에서 4300억원대 매출을 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계획대로라면 2015년 그룹 매출은 1조4000억원 정도 될 것이다." -와인 사업에 나선 것은 어떤 계기인가. "서양에서는 1인당 연 200병씩 마시는 술이 와인이다. 쉽게 말해 날마다 모든 사람이 즐기는(Everyday Drink Everybody Drink) 주종이다. 그러나 과거 한국에선 한정된 계층만의 주류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값싸고 좋은 와인을 선보이겠다는 의무감에서 97년 사업을 시작했다. 10년 넘게 자칭 '와인 전도사'로 살았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최고로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 "최근 임직원에게 고객 만족 고객 감동을 넘어 '고객 기절'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은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들은 말이다. 얼마 전 나라식품과 거래하는 칠레 몬테스 와이너리의 더글라스 머레이 공동 창업자가 이 호텔에 묵었다. 머레이 회장이 이 호텔을 극찬하기에 알아보니 그가 사용한 방의 침대보와 베개 등에 '몬테스' 브랜드를 새겨 놓았다고 한다. 정말 고객 기절이 있구나 생각했다. 모든 사람에게 '상대'가 있게 마련이다. 비즈니스는 더욱 그렇다.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은 디테일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회장은 명절 때 지인에게 선물을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을 더 챙긴다. 택배 서비스도 가급적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너무 쉽게 하려고 해선 안 된다"고 훈수했다. "큰 비즈니스는 큰 회사가 하면 된다. 하나를 해도 1등을 하는 것 더 나아가 명품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길이다. 경쟁자가 인정해 주는 1등을 해야 한다. 페라리 수입이나 아직 돈을 벌지 못하지만 해가온 사업 와이너리 운영 등에서 이런 값진 공부를 한다." WHO? 1945년 충남 논산생. 운산그룹 창업자인 고 이용구(1914~93) 회장의 차남. 경기고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94년 한국제분 대표이사, 97년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2002년부터 한국제분공업협회장을 맡고 있다. 180cm의 훤칠한 키에 테니스·골프·스키 등을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 올봄 오랜만에 테니스를 치다 어깨를 다쳐 요즘 운동을 쉬고 있단다. ‘와생사’(와인을 생각하는 사람들) ‘국생사’(국악을 생각하는 사람들) 같은 모임을 만들어 지인과 교류하기를 즐긴다. “이웃부터 잘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의 집이 있는 서울 가회동을 비롯해 인근 명륜동·창신동 일대의 불우이웃을 돕는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프랑스 메도크 그라브 와인 명예기사(2001년), 쥐라드 드 생테밀리옹 기사(2002년), 콩프랑스 샴페인협회 명예기사(2005년) 등 다양한 와인 관련 기사 작위와 프랑스 농업공로훈장(2007년), 국민훈장 모란장(2008년) 등을 받았다. 정영화(63)씨와 1남3녀를 두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삼남인 재만씨가 첫째 사위, 조석래 효성 회장의 장남인 현준씨(효성 사장)가 셋째 사위다. 차진용.이상재 기자

2009-12-17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17] 서민석 동일방직 회장

한 손엔 실 뽑는 면방부터 패션 사업이 다른 손엔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시작한 알루미늄 제조업이 알토란처럼 들려 있다. 그리고 지금 머릿속엔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바이오산업을 그리는 중이다. 서민석(66) 동일방직 회장 얘기다. 서 회장은 "현재는 섬유 소재와 패션 알루미늄 사업이 동일의 주축이다. 신성장동력 찾기가 숙제"라고 말했다. 느긋하면서도 긴장감이 배어 있는 말투였다. 동일은 모회사인 동일방직을 주축으로 동일Y&K.동일알루미늄.동일드방레.동일레나운.동일산자 등 10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지난해 그룹 매출은 5286억원 영업이익은 177억원이었다. -면방 회사로서 동일방직의 강점은. "동일은 경쟁 업체보다 제품 종류가 다양하다. 쉽게 말해 다품종 소량 생산이 우리의 장기다. 생산 능력은 10만6000추(1추는 실 한 가닥이 생산되는 단위) 정도 된다." -'마라톤사'가 유명하다고 들었다. "계열사인 동일산자에서 만드는 재봉사다. 이게 60년대 나온 제품인데 지금도 재봉사 시장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튼튼하면서 잘 끊어지지 않아 '마라톤'이라는 브랜드를 붙였다.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고민에서 나온 성과물이다. 봉제 수출에도 크게 기여했다." -올해 그룹 실적은 어떻게 전망하나.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미국.유럽 시장이 좋지 않았다. 한국 경기마저 침체를 겪었다. 수출이 늘기는 했지만 (물량이 늘어난 게 아니고) 원화 가치 하락 때문이었다. 환율 기복이 심한 것은 기업 경영에 바람직하지 않다. 어쨌든 전대미문의 금융위기치고는 선전했다. 그룹 매출이 5700억~5800억원쯤 돼 지난해보다 소폭 신장할 것으로 보인다." 동일의 모체는 32년 일제시대 때 인천에 세워진 동양방적이다. 이 회사를 서 회장의 부친인 고 서정익 사장이 55년 인수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면방 사업으로 출발했지만 동일은 일찌감치 패션 쪽에 발을 들여놔 일반인에겐 '라코스테' '아놀드파마' '까르뜨블랑슈' 같은 브랜드로 친숙하다. 한편으론 충남 천안에 알루미늄 관련 제품 제조업체(동일알루미늄)를 설립하기도 했다. 서 회장은 "지금은 소재(면방)와 패션 알루미늄 사업 비중이 각각 3분의 1쯤 된다"고 소개했다. -패션 사업 실적은 어떤가. "프랑스 드방레와의 합작사로 라코스테 브랜드를 취급하는 동일드방레는 선전하고 있다. 라코스테는 크리스토퍼 르메르라는 유명한 아티스트 디렉터의 책임 아래 세계 어디서든 똑같은 제품을 내놓는다. 패션 용어로 '오리지널리티가 탁월하다'고 하는데 실적도 만족스럽다. 하지만 일본 레나운과의 합작사로 아쿠아스쿠텀.아놀드파마 등의 브랜드 제품을 파는 동일레나운은 고전하고 있다. 최근 2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신용카드 대란 여파로 2004년을 정점으로 내리막을 걷고 있다. 내부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대기업병을 앓았던 게 아닌가 싶다.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면서 '명가의 부활'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요즘 직원들 눈빛이 달라졌다. 2011년엔 흑자 전환할 것이다." -자체 브랜드를 새로 만들 생각은 없나. "브랜드 정체성을 만들고 유통 기반도 확보해야 해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새로 독자 브랜드를 만든다면 한국이 아닌 인구 12억명의 중국 시장을 타깃으로 해 보고 싶다." -면방에서 패션까지 수직 계열화 이뤘다. "면방을 하다 염색 사업에 진출하다 보니 다운스트림(최종 생산품)으로 흘러간 것이다. 가치사슬 완결 구조를 이루게 됐다. 선친에게서 이어받은 경영철학이 '창의개척'이다. 나름대로 그 원칙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사업 일관화로 얻는 장점은 무엇인가. "한 걸음씩 소비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게 뭔지 불만이 뭔지 알 수 있어서다. 그룹 차원에서 섬유연구소를 만들어 계열사 연구원끼리 머리를 맞대고 제품을 개발한다. 땀을 흡수하고 자체적으로 열을 내는 기능성 소재 '웜 후레시' 가닥마다 굵기가 달라 의류의 표현력을 높인 '멀티 카운트' 같은 제품이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알루미늄 사업 매출이 1500억원대에 이른다. 알루미늄은 섬유 업체로선 생소한 분야인데 어떻게 진출하게 됐나. "사업을 다각화하는 의미에서 시작했다. 알루미늄 포일 뿐만 아니라 에어컨.자동차에 들어가는 열교환기를 만든 덕분에 외형이 커졌다. 충남 천안에 공장을 지은 게 89년이다. (웃으면서) 그런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운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 단련받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알루미늄 사업은 수익성이 좋고 성장 폭도 커 '앉아서 파는 사업'으로 불렸다. 우리는 신출내기였지만 과감하게 '새집'을 짓는 투자를 했다. 그런데 웬걸 사업 초기 기술도 기술자도 없어 엄청 고생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러시아가 투매 물량을 쏟아 내면서 제품 가격이 폭락했다. 결국 10년 넘게 적자를 보다가 3년 전부터 이익을 내고 있다. 요즘은 계열사 가운데 손에 꼽히는 효자다. 그래서 사업은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무엇이 중요한가. "첫째가 타이밍이고 그 다음이 자금력이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도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유동성 확보가 가장 중요하지 않았나 싶다. 경쟁사와 차별화된 품질과 경쟁력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어떤 업종에 들어설 타이밍인가. "아직 이렇다 할 만한 사업을 찾지는 못했지만 신성장동력으로 바이오산업과 신재생에너지 쪽을 눈여겨보고 있다. 일부 기업에 지분 투자를 하고 있다." -인수합병도 계획하고 있나? "그렇다. 우리는 이쪽 분야에 인력이 없다. 무에서 시작할 순 없다." -면방 업계 어른으로서 후배에게 조언한다면. "업황이 최고조에 달했던 80년대 말에 비하면 지금 업계 외형이 3분의 1로 줄었다. 저임금 생산국 상품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인 것도 맞다. 그런데 어느 산업치고 개발도상국에 도전받지 않는 업종이 있나. 그렇게 탄탄하다는 조선업도 수주 잔량에서 중국에 밀렸다. 이런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는 해답은 꾸준한 설비 투자 끊임없는 연구개발 '한군데 모여 같이 크는' 클러스터 전략이 될 것이다." 섬유업에서만 40년째 단련된 내공 덕분일까. 서 회장은 시종 여유 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아픔이 많은 경영인이다. 서울대 공대를 나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것이 70년. 불과 3년 뒤 서 회장은 부친을 잃었다. 대표이사에 오른 것은 78년이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다섯이었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70년대를 상징하는 노사 분규였던 이른바 동일방직 사태가 터졌다. 그는 "사실 그 사건이 지금까지 뒷다리를 잡고 있는 느낌"이라며 운을 뗐다. 서 회장은 2세 경영인으로 어려움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어렵게 회사를 물려받았다. 더 나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일념 뿐이었다. 좋은 아버지 만나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과 능력을 평가받고 싶었다." WHO? 1943년 서울생. 고 정헌 서정익(1910~73) 동일방직 창업자의 장남. 경기고와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미시간대 경영대학원에서 유학했다. 동일방직 과장(70년)으로 입사해 78년 이후 지금까지 이 회사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조흥은행 회장(95년)과 대한방직협회장(95년), 국제섬유제조자연합회장(98년)을 역임했으며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94년 이후), 섬유산업연합회 부회장(97년 이후), 메세나협의회 부회장(2006년 이후) 등을 맡아 왕성한 대외 활동을 하고 있다. 음악 매니어로 집무실에 300장이 넘는 레코드판을 보유하고 있다. 2년 전부터 색소폰을 배워 이장희 작사·작곡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등을 즐겨 연주한단다. 내년 여름께 첫 무대에 설 계획. 상공의날 석탑·은탑·금탑 산업훈장 등을 받았고,한국공학한림원 선정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2006년)’에 꼽혔다.

2009-12-10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16]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맞은편에 있는 일신방직 본사는 이름을 '일신 갤러리'라고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건물 입구에 있는 이탈리아 조각가 마우로 스타치올리의 거대한 추상 조형물 '일신 여의도 '91'이 손님을 맞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발걸음을 건물 내부로 옮기면 촘촘하게 미술품을 뿌려놓은 복도 전시장을 만나게 된다. 실 뽑는 방적 회사의 본사가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이 회사 김영호(65) 회장은 "모든 작품을 직접 골랐다"면서도 '보유 작품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엔 "일일이 헤아려 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컬렉션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나. "1974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부터다. 처음엔 서울대나 홍익대 등 미술대학 졸업 전시회를 찾아 다녔다. 마음에 닿는 작품이 있으면 학생들 셋방살이하는 곳을 찾아가 둘둘 말린 그림을 사기도 했다." 김 회장이 대학가 자취방에서 골라낸 옥 가운데 한 명이 팝 아티스트 고영훈이다. 김 회장이 75년 구입한 '코카콜라'는 현재 한국 팝 아트의 효시 격으로 불린다(이 작품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특별 전시됐다). 그의 심미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신방직은 김 회장의 부친인 고 김형남 회장이 세운 한국 1위 면방적 회사다. 일제가 36년 세운 전남방직이 모체다. 고 김 회장은 고 김용주 대한해운공사 사장 고 이한원 동아상사 사장 등과 손잡고 51년 이 회사를 인수했다. 이후 이한원 사장이 지분을 정리했고 61년 일신방직과 전남방직으로 분리됐다. 김 회장이 전하는 분리 과정이 흥미롭다. "처음엔 담을 쌓고 각자 활동을 했다. 그러다 일신은 대로변 쪽 회사 정문 터를 보유하는 대신 회사 이름(전남방직)을 양보하기로 합의했다. 이때 선친께서 회사 이름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의 일신으로 정했다. 목화씨를 한반도에 들여와 이 땅에 면 산업이 있게 한 문익점 선생의 자도 일신이다." -면방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이었지만 지금은 사양산업인데. "(웃으면서) 그런 얘기를 80년대 초반부터 들었다. 그러면 한국에 있는 방적 회사는 모두 문을 닫아야 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양산업이란 얘기가 거론된 지 10년쯤 지난 80년대 말부터 2~3년간 면방업계는 최고 호황을 누렸다. 지금도 괜찮다. 현재 국내엔 114만 추의 설비가 남아 있다. 최전성기(370만 추) 때보다는 줄었지만 아직은 경쟁력이 있다. 그중 일신이 19만 추를 보유하고 있다." -일신은 업계에서 최고의 품질과 생산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자동화 시스템을 갖추고 꾸준히 비용 절감을 꾀했다. 가장 많은 물량이 세계 최대 의류.봉제 생산국인 중국으로 수출된다. 미국이나 유럽의 까다로운 고객이 중국 업체에 (우리 회사 제품처럼) 품질 좋은 실을 사용해 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면 도움이 될까. "미국 수출은 당연히 늘어날 것이다. 중국이나 동남아 시장에 대한 기대도 크다. 지난 10년 새 중국의 1인당 의류 소비량은 2.5배 늘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섬유 산업도 성장했다. 인도.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인구가 많으면서 잠재력 있는 시장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섬유 시장도 나름 블루오션이다." 김 회장이 회사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은 75년 일신방직의 자회사인 ㈜신동이라는 봉제회사 대표를 맡으면서다. 당시 신동은 적자를 면치 못해 월급날이면 일신방직에 손을 벌리곤 했다. 고 김 회장이 매각하려는데 김 회장이 나섰다고 한다. "내가 맡아보겠다고 손을 들었다. 봉제의 '봉'자도 경영의 '경'자도 모르던 때였다. 다만 다른 봉제회사는 다 잘되는데 우리만 안 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사람 문제였다. 당시 봉제산업의 경쟁력은 주문 물량을 제때 소화하는 데 있었다. 숙련공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그런데 경험 많은 직원들을 경쟁사에 빼앗기기 일쑤였다. 월급도 올려주고 공장에 내려가 고기도 사주면서 직원들을 붙잡았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어떨 땐 퇴근시간이 밤 11시30~40분이었는데 통행금지만 없었다면 더 오래 일했을 것이다. 1년 뒤 회사는 흑자로 돌아섰다." 이후 김 회장은 친형인 김창호 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82년 일신방직 대표이사에 취임한다. 그러나 또 다른 위기가 김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83년 12월 광주 방적 2공장에서 누전으로 화재가 난 것이다. 공장 건물과 정방기.합연사기 등 설비가 모두 소실돼 수백억원대 손실을 봤다. -어떻게 극복했나. "공장 재건을 위해 백방으로 뛰면서 일본.이탈리아.서독 등 선진국 시설을 견학할 수 있었다. 이후 유럽에서 고속생산 설비를 들여왔다. 재가동 2년 만에 투자 자금을 모두 회수했다. 업계에선 통상 투자 7~8년 내 자금을 회수하면 괜찮다고 본다. 그런데 2년 만에 해냈으니 기대 이상이었다. 자금 여유가 생겨 청원공장도 지을 수 있었다." 일신은 이후에도 광주 직포공장(90년) 충북 청원공장(2005년)이 화재로 소실되는 불운을 겪었지만 잘 극복했다. 김 회장에게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였을까. "오일쇼크 이후가 힘들었다. 원면 가격이 파운드당 1달러까지 올랐다. 반면 완제품 실 값이 80~90센트였으니 공장을 안 돌리는 게 더 나을 정도였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원면 가격은 파운드당 70센트 정도다. 면방은 원가 중 원료 비중이 60%에 달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래회사와 신용을 지키기 위해 비싼 값에 원면을 구입했다." 김 회장은 '면방 한 길'을 걸었지만 신사업 개척도 놓치지 않았다. 일신은 현재 패션 벤처기업 지오다노를 비롯해 창투사인 일신창업투자 와인 수입을 주로 하는 신동와인 천연 화장품 '바디숍'을 유통하는 BSK코퍼레이션 등 7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지난해 말 계열사의 총자산은 5300억원이었다. -패션 브랜드 '지오다노'가 젊은이들에게 최고 인기를 누렸는데. "90년대 런칭 초창기에는 매년 30%씩 성장했다. 지금은 '자이언트급 브랜드'가 들어오면서 경쟁이 치열하다." -요즘 주가가 5만9000원대 시가 총액은 1400억원대로 연초에 비해 변화가 거의 없다. 증권가에서는 '안전하지만 재미없는 주식'이라고 한다. "인기 없는 주식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특별한 움직임이 없어서 그렇다. 그러나 장기 투자자라면 관심을 가질 만하다. 장부 가격만 따져도 자산이 시가총액의 세 배가 넘는다." -와인 매니어로 유명하다. 와인 수입회사인 신동와인까지 세웠는데. "신동와인은 처음부터 비즈니스를 하려고 세운 회사는 아니다. 미국 유학 시절 99센트짜리 와인을 즐겨 마셨는데 이게 와인을 즐겨 찾는 계기가 됐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마시고 싶은 와인을 구하기 어렵더라. 한번은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와인 카탈로그를 보내왔다. 욕심이 생겨 보르도 1등급 와인을 몇 상자 구입했다. 알다시피 개인별 와인 구입 한도는 2병이다. 그 와인 맛을 보기 위해 관세는 물론 와인 값보다 많은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이때 '와인 수입면허가 있다면 관세만 물면 되는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결국 어렵게 수입면허를 받았다. 나중에 산지별로 품질이 우수하다는 '로마네 콩티' '기갈' '안젤로 가야' 등 유명 브랜드와 독점 계약을 맺었다. 와인 사업은 10년 넘게 적자를 내다 2002년부터 돈을 벌고 있다. 적자가 나면 문을 닫거나 다른 수를 찾아야 하는데 와인에 대한 애착 때문에 계속 유지했다. 그러다가 와인 붐이 불면서 이익을 내고 있다." -메세나 활동이 기업 경영에 도움을 주나. "고정관념을 갖지 않고 유연한 사고를 하도록 돕는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창조 작업이다. 과거를 모방해서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나는 가급적 아랫사람을 간섭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신의 경영은 젊은 창작가들에게 상당히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 WHO? 1944년 전남 목포생. 숭전대 초대 총장을 지낸 고 김형남(1905~78) 일신방직 회장의 차남. 서울고를 나와 연세대 건축공학과 재학 중 뉴욕의 프랫대학교로 유학해 건축학을 전공했다. 82년부터 일신방직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숭실대 재단 이사장(83년), 대한방직협회장(97년) 등을 지냈다. 활발한 문화예술 후원 활동으로 몽블랑 후원자상(2007년)을 받았다. 일신방직은 지난해 2732억원 매출에 234억원의 이익을 냈다. 광주광역시에 2개의 방직공장, 경기도 반월에 1개의 염색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지오다노, 일신창업투자, 신동와인, ㈜신동, BSK코퍼레이션 등 7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총 자산은 5300억원. 매출 4900억원. 차진용.이상재 기자

2009-11-25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15]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

"우리는 '위기'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회사가 바라는 방향대로 잘 가고 있다. 그러나 어떨 땐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날 수도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양귀애(62) 대한전선 명예회장은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재무구조 개선 얘기가 나오자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또 "나는 아주 감성적이면서도 아주 이성적인 요즘 말로 쿨(cool)한 사람"이라며 "곪은 곳을 도려내 더 좋은 회사를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오전 5시쯤 기상해 자정 무렵 잠자리에 들 때까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다. 회사 주요 현안과 두 재단(인송문화재단.설원량문화재단) 업무를 챙기면서 감성경영을 실천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재계에서 '부지런히 공부하는 회장님'으로 유명하다. "세계경영연구원.삼성경제연구소 등의 최고경영자(CEO) 특강을 많이 듣고 있다. 지금까지 리더십.사진.음악.영화 등 20여 개 강좌를 들었다. 요즘도 일주일에 두 번은 수업받으러 간다." -시간을 쪼개 공부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학교 다닐 때부터 재미없는 모범생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자동차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면서 공부할 시간을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하는 게 기업 경영에 엄청 도움이 된다. 특히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데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업종인 전선업을 하면서 '감성'을 입힐 수 있어 만족스럽다." 양 명예회장은 한 달에 한 번씩 임원진을 자신의 서울 서초동 집으로 초청해 영화를 함께 보면서 서로의 경험과 가치를 공유하는 '시네 데이트'를 즐긴다. 주말이면 전북 무주에 있는 계열사인 무주리조트에 가 '새터데이 안단테(Saturday's Andante)'라는 음악회를 연다. 사내 합창단 '대한하모니'도 만들었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을 통해 기업을 보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영어 어휘를 풍성하게 늘리고 베토벤이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고 하지 않나. 비슷한 이치다. 사람의 감성을 터치하면 기대 이상의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이것은 아름다운 모성에 비유될 수 있다. 나는 음악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얻는데 이런 힘을 임직원과 공감하고 싶다. 좋은 동기 부여 수단이 될 것이다." 양 명예회장은 아주 어려서부터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국제그룹 창업자인 고 양태진 회장의 막내딸로 태어난 그는 여섯 살 때 처음 피아노를 접했다고 한다. 꾸준히 피아노를 쳐 대학에서도 음악을 전공했다. 고 설 회장과 결혼하면서 음악가로서 삶은 포기했지만 그를 절망에서 다시 일으켜 준 것은 피아노였다. "2004년 3월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불면의 밤을 지냈다. 남편 사진을 보면 너무 힘들어 (타계 후) 1~2년간은 집 안과 사무실에서 사진을 모두 감춰 놓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이겨 내도록 도와준 게 피아노다. 하루 10분 20분씩 피아노를 치면서 상처를 치유받았다. 피아노는 나에게 비타민 같은 존재다. 건강을 유지하는 데 비타민이 큰 도움이 되듯 나는 피아노를 치면서 에너지를 얻는다."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기업 경영 쪽으로 옮겼다. 대한전선은 2002년 무주리조트를 시작으로 쌍방울(현 트라이브랜즈).명지건설(현 TEC건설).남광토건.한국렌탈 등 10여 개 회사를 거푸 사들이면서 인수합병(M&A)의 기린아로 불렸다. 해외에서 콩고 전선회사 CKT 캐나다 밴쿠버 힐튼호텔 등을 인수하기도 했다. 2007년엔 이탈리아의 세계 최대 전선회사인 프리즈미안의 지분 9.9%를 인수해 화제가 됐다. 그러나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요즘은 '몸집 줄이기'에 나서는 상황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경영이 힘들지 않나. "대한전선이 프리즈미안 지분을 인수한 이후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터져 유럽 증시가 침체에 빠졌다. 큰 평가 손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보다 우려가 부풀려졌다. 현재는 유동성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면서 착실하게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유상증자를 하고 신주인수권부사채를 발행했으며 자산 매각을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다. 회사와 관련된 안 좋은 루머가 있는데 이 기회에 불식됐으면 한다. 전문경영인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가면 된다'며 격려한다." -회사가 안정된 것인가. "물론이다. 대한ST를 필두로 한국렌탈.트라이브랜즈 등의 매각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주채권 은행과 재무구조 개선 협정을 체결한 대로 하고 있다. 정리할 것은 과감하게 하겠다. 그래야 시장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앞으로 대한전선 그룹은 어떻게 바뀔까. "세계 10위권인 전선사업이 기본 축이다. 대한전선 매출(2조4000억원) 가운데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65%가 넘는다. 전선사업은 뉴욕과 샌디에이고의 초고압 전력선 사업을 수주하는 등 선진국 시장에서 실력을 검증받고 있다. 여기에 역량을 더할 수 있는 건설 부문을 강화할 것이다. 아울러 레저사업도 적극 챙길 것이다." -최근의 위기에서 얻은 교훈은. "우리는 위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곪은 살에서 새 살을 돋게 하기 위한 전초 작업이다. 계획대로 충실히 잘되고 있다. 우리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고 했는데 실제로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나더라(웃음). 꿋꿋하게 우리가 설정한 방향대로 가고 있다. 시장의 우려는 기우다." 대한전선은 1960~70년대 한국 굴지의 가전회사였다. 지금도 이 회사의 '원투제로(1.2.0) 냉장고' '무지개 세탁기' 같은 브랜드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업체 간 출혈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석유 파동이 닥치자 고 설원량 회장은 가전사업 부문을 83년 대우에 넘긴다. 지금과 83년 상황을 비교하면 어떨까. "당시 전선보다 가전 매출이 많았다. 가전 부문 매각으로 임직원 9000명 중 6000명이 대우로 가야 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비주력 부문을 정리하고 주력은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이 있다. CEO의 결단이다. 회사가 어려웠을 때 남편은 집에 들어오면 캔버스에 유화를 그렸다. 음악을 잘 모르는 분이었는데 언젠가는 음표 하나하나를 그리면서 작곡을 한 적도 있다. 그렇게 자기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이런 자기 절제 능력 덕분에 대한전선은 '본체(전선사업)'를 망가뜨리고 허우적거리는 미련을 범하지 않았다. 현업에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 시기 '환부 제거를 위해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회사가 나아갈 방향 시너지 낼 방향 등을 쿨하게 정한다." -앞에선 감성경영을 강조했는데 결단은 냉정한 것 같다. 기업가의 유전인자(DNA)를 이어받아서 그런가. "(웃으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떨 땐 병력이 그렇듯 기업인의 DNA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기업가의 피도 있고 식탁에서 배운 것도 있다. 요샌 아들을 보면서 이런 걸 느낀다." -경영 조언을 구하는 대상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CEO와도 얘기하고 삼촌(설원봉 대한제당 회장)과도 상의한다. 어떨 땐 아들과 외부 분들과도 의견을 나눈다. 나는 '열린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거리낌이 없다. 주변에서도 '굉장히 솔직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 보라. 자기가 내보이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진정성을 얻을 수 있겠나. 모두 '내 편'을 만들려면 내 마음을 먼저 열어야 한다." WHO? 1947년 부산생. 경남여고와 서울대 음악학과를 졸업했다. 국제그룹 양태진(1901~76) 창업주의 막내딸로 양정모(1921~2009) 전 국제그룹 회장과 양규모(69) KPX 회장이 친오빠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69년 설원량(1942~2004) 대한전선 회장과 결혼했다. 남편이 뇌출혈로 갑작스레 타계하면서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오너로서 회사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그룹의 설원량문화재단과 인송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 추석 무렵 무주리조트에서 보름 상간에 두 번이나 홀인원을 했는데 핸디는 90 정도라고. 대한전선 전무로 재직 중인 설윤석(28)씨와 군 복무 중인 설윤성(25)씨 형제를 두고 있다. 차진용.이상재 기자

2009-11-19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14] 이강호 한국 그런포스펌프 사장

한 회사에서 20년째 최고경영자(CEO)를 맡아온 전문경영인이 있다. 그것도 정년인 만 60세까지 보장받은 자리다. 덴마크계 펌프 회사인 그런포스펌프의 한국법인을 책임지고 있는 이강호(58) 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런포스는 일반인에게 낯설지만 업계에서는 최고 실력자로 통한다. 이 사장은 이 회사가 1989년 한국에 진출한 이듬해 250대 1의 경쟁을 뚫고 '공채 CEO'로 선발돼 지금까지 이 회사 성장을 이끌고 있다. -최근 10년간 한국에 신축된 30층 이상 고층 빌딩 가운데 90% 정도가 그런포스펌프를 쓴다고 하는데. "서울 여의도 63빌딩 리노베이션 공사를 비롯해 도곡동 타워팰리스 강남 파이낸스센터 빌딩 등에 우리 펌프가 들어갔다. 사람 사는 곳 어디에든 펌프 없는 곳이 없다. 모든 산업현장도 그렇다. 철강 제품은 물론 반도체.액정표시장치(LCD) 등 한국이 자랑하는 '수출 공신'도 물이 없으면 생산할 수 없다. 그런포스는 고층 건물과 산업 분야 펌프 업계의 리더다. (웃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펌프는 인체의 심장이다. 그다음이 그런포스 아닐까." -왜 그런가. "그런포스는 45년 덴마크에서 설립됐다. 60여 년간 400개 넘는 특허기술을 축적했다. 자체적으로 펌프를 구동하는 컴퓨터 칩까지 생산한다." -그런포스가 한국에 진출한 지 20년이 됐다. 얼마나 성장했나. "90년 회사 경영을 맡을 당시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에서 '앞으로 20년 뒤 시장점유율 25% 회사로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점유율이 27%쯤 된다. 올해도 5%쯤 성장할 것이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엄청 허리띠를 졸라맨 덕분이다. 직원들이 토요일 근무를 자청하기도 했다. 앞으로 5년 안에 한국 1000대 기업에 진입하는 게 목표다." 이 사장은 "교육하면서 영업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는 2003년부터 충북 음성 공장에서 국내 엔지니어를 대상으로 '그런포스펌프 아카데미'를 열어오고 있다. 지금까지 600여 차례 행사에 1만4000여 명의 엔지니어가 다녀갔다. "최근 그런포스에서 고효율 친환경 제품인 'E-펌프'를 출시했다. 1400여 가구가 입주한 아파트에 이 펌프를 설치하면 연간 1000만원어치 연료를 줄일 수 있다. 이런 신제품이 나오면 독일에서는 품귀 현상을 빚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2년은 구매를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교육 마케팅이 중요하다. 물론 효과도 보고 있다." -한국내 펌프 회사인 청석펌프와 금정공업을 인수한 이유는. "그게 아주 힘든 일이었다. 회사를 파는 사람도 돈을 내는 사람도 힘들게 설득했다. 청석은 가스보일러에 들어가는 소형 순환펌프를 주로 만든다. 그런포스의 이 분야 국내 시장 점유율이 65%다. 그런데 외환위기 때 원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경쟁사였던) 청석에 시장을 많이 뺏겼다. 빼앗긴 시장을 되찾아 와야 했다. 청석을 인수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여러 차례 청석에 찾아가 자본과 기술력을 보강해 세계 시장에 수출할 제품을 만들겠다고 설득했다. 지금 청석은 일본에 수출하고 있고 미국과 유럽연합에도 수출을 타진 중이다. 금정은 오폐수 펌프 전문기업인데 청수(淸水) 전용 펌프를 생산하는 그런펌프로서는 이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금정 제품은 그런포스의 글로벌 판매망을 이용해 세계 22개 나라에 수출하고 있다. 광주 평동공단 공장을 완공해 내년이면 수출이 더 늘어날 것이다." 이 사장은 재계에서 보기 드문 육군사관학교 출신 CEO다. 육사 29기로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그의 동기생이다. 육사를 졸업하면서 '대표 화랑상'을 받아 전도유망했던 그는 78년 대위 때 돌연 군복을 벗었다. 이 사장은 "당시 결정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군 출신 CEO로서 장점은. "군에 있을 때 지리산 종주 같은 특수 훈련을 자주 했다. 강인한 체력은 기본 중 기본이다. 외국 출장을 가면서 시차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다. 또 한 가지는 임무 완수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지면 죽음이다. 사업에서 실패하면 도산이다. 군인이든 기업가든 반드시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성과를 내야 한다. 제너럴일렉트릭 출신으로 하니웰 CEO로 영입된 래리 보시디가 쓴 '실행에 집중하라(EXECUTION)'라는 책에 "대개의 직원이 똑똑하며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효과적으로 일하고 마무리까지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런 면에서라도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는 군대 경험이 값지다." -사회에 나와 처음 구한 직장이 도자기 회사였던 진흥요업이다. "지인의 소개로 들어간 진흥은 국내 1호 종합요업 회사였다. 당시 도자기는 10대 국가 전략산업이었다. 세라믹 타일 도자기를 들고 미국부터 유럽.중동 등 전 세계를 누볐다. 1000만 달러 수출탑을 받기도 했다." 이후 이 사장은 유원건설 자회사였던 하림통상 뉴욕 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하림통상은 유원건설이 건자재 조달을 위해 만든 무역회사. 이 사장은 하림통상과 유원건설에 10년 가까이 몸담았다. -그런포스로 옮기게 된 계기는. "오랫동안 외국을 드나들면서 글로벌 기업이 더 많이 한국에 진출하고 한국 기업이 더 많이 세계로 나가야 한다는 소신을 갖게 됐다. 당시만 해도 글로벌 기술과 자본 경영 노하우를 한국에 접목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38세의 나이에 CEO에 취임하면서 60세까지 정년을 보장받았다. "당초 그런포스에 합작회사를 만들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단 1주도 개인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게 회사 방침이라 안 된다고 하더라. 실제 그런포스는 창업자 이름을 따서 만든 '폴 듀 엔슨 재단'이 지분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 합작사 대신 평생직장을 보장하는 계약을 하자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대만 그런포스 회장도 맡고 있다. "그런포스는 국가가 아닌 지역 단위로 쪼개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한국과 대만 아세안 호주와 뉴질랜드 등으로 사업 영역을 구분했는데 올해부터 대만 회장을 겸임하게 됐다. 덕분에 해외 출장이 더 늘어났다." -20년째 회사를 경영하면서 힘들었을 때는. "외환위기 때다. 조금 전에 말했던 대로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우리 제품 가격이 올라가 고생 많이 했다. 청석펌프를 인수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글로벌 CEO를 꿈꾸는 후배 기업인들에게 조언을 해 준다면. "소니의 하워드 스트링거 닛산의 카를로스 곤 펩시코의 인두라 누이 같은 기업인을 봐라. 이방인인데도 글로벌 기업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세계적 기업의 CEO에 왜 한국인은 안 되나.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려면 먼저 언어 능력이 필수다. 영어로 계약서를 검토하고 협상할 수 있어야 하며 임직원과 고객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또 현실적인 사업 감각이 필요하다. 이것은 젊을 때 글로벌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 가능할 것이다." WHO? 1951년 서울생. 중앙고와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수도경비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 등에 근무했다. 고려대 경영대학원 석사(76년)와 동국대 경영학 박사(2006년)를 받았다. 진흥요업(78년), 하림통상(80년) 등을 거쳐 90년 한국그런포스펌프 CEO가 됐다. 육사 시절 성적순으로 자리 배치했는데 영어 시간에는 ‘1교반 1석’을 도맡아 차지할 만큼 영어를 좋아했단다. 10여년간 스텝 에어로빅으로 다듬은 몸매 덕분에 5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해 보인다. 요즘은 주로 헬스와 스키·골프를 즐긴다고. 차진용.이상재 기자

2009-11-12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13] 서정호 앰배서더호텔그룹 회장

더욱이 이 호텔이 1955년 10월 19개 객실 규모의 '금수장 호텔'로 출발해 오늘의 모습을 지니게 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앰배서더가 노보텔 앰배서더 강남.노보텔 앰배서더 독산.이비스 앰배서더 서울 등 4개의 호텔을 직영하고 수원.창원.대구 등에 5개의 프랜차이즈 호텔을 위탁 경영하고 있으며 호텔 시설관리 회사인 의종개발을 두고 있는 토종 호텔그룹이란 것은 일부 호텔업계 종사자 아니면 모를 듯싶다. 이렇듯 조용히 호텔사업을 키워온 서정호(56) 앰배서더호텔그룹 회장을 그랜드 앰배서더 호텔 14층 비즈니스센터에서 만났다. "왜 회장실이 아닌 곳에서 인터뷰를 하느냐"는 첫 질문에 서 회장은 "워낙 좁고 볼품 없어 남들에게 보여주기 민망해서"라며 털털 웃었다. 가장 좋은 자리는 고객에게 돌린다는 호텔업의 원칙 그대로다. 그는 출퇴근할 때 직원들이 고객이 아닌 회장에게 신경 쓰는 것이 불편해 호텔 정문이 아닌 뒷문을 이용한다. 앰배서더는 총 2700여 개 객실을 보유하고 있으며 지난해 직영 호텔 4곳에서만 1100억원대 매출을 올렸다. -지난 7월 장충동 호텔 이름을 '그랜드 앰배서더'로 바꿨는데 무슨 사연이 있나. "소피텔은 세계 5대 호텔 그룹 중 하나인 프랑스 아코르(ACCOR)의 브랜드 가운데 하나다. 앰배서더는 아코르와 87년부터 제휴관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마침 소피텔 브랜드 계약이 만료돼 우리만의 정체성을 살리고 싶어 이름을 바꿨다. 우리는 65년부터 사용한 '앰배서더'라는 토종 브랜드를 지켜왔다. 한국 호텔 업계에선 보기 드문 일이다. 메리어트면 메리어트 힐튼이면 힐튼이지 로컬 브랜드를 해외 유명 브랜드와 병행해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브랜드를 공유한다는 것은 사실 심장을 나눠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피텔 브랜드 계약이 만료되면서 이제는 독자 브랜드를 쓸 타이밍이구나 싶었다. 아코르 측도 거절하지 않았다. 같은 취지에서 지난해 1월엔 새 기업 이미지(CI)도 선포했다." -지난해에만 대구.수원.창원 등 세 곳에 호텔을 열었다. "정확히는 우리가 경영을 맡은 곳이다. 실제 소유주는 다르다. 이제 호텔은 서비스 지식 노하우를 파는 기업으로 진화했다. 특히 우리처럼 독자적으로 호텔 사업을 하는 회사는 대기업에 비해 직접 투자할 여력이 적다. 고유 브랜드를 키워서 그 브랜드를 확장하는 것이 현명하다. 서울 네 곳을 빼고는 모두 이렇게 경영 계약을 했다. 호텔 개발.건축 시설관리 등을 전문으로 하는 의종개발이라는 회사도 있다. 한국에서 호텔 비즈니스의 수직 계열화를 이룬 유일한 회사가 앰배서더다." -글로벌 경제위기에 신종 플루까지 겹쳐 요즘 경영 사정이 어렵지 않나. "질병.테러.이상기온 등이 사업에 영향을 미친다. 세계가 한 울타리가 되면서 겪는 역작용이다. 글로벌 위기가 닥치자 처음엔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환율 효과를 크게 봤다. 특히 가을 들어 일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서울 강북 쪽 호텔은 아주 실적이 좋다. 이비스 명동만 해도 8월부터는 방 구하기가 힘들 정도다. 그랜드 앰배서더도 마찬가지다. 이비스 명동은 지난해 대비 15% 이상 그랜드 앰배서더는 7~8%쯤 매출이 늘었다. 하지만 일본 특수를 기대하기 힘든 노보텔 강남이나 노보텔 독산은 성적이 안 좋아 전체적으로 3~4% 정도 성장할 것 같다." -하루 숙박요금 10만원대의 실속형 호텔 '이비스' 브랜드를 선보여 주목받았다. "첫 시작은 2003년 강남의 금싸라기 땅이라는 대치동에 세운 이비스 앰배서더 서울이다. 지금은 세 개가 됐다. 중증호흡기증후군(SARS) 신종 플루 같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줄곧 객실 판매율이 90%가 넘는다. 앰배서더가 이런 차별화한 상품을 선보인 것은 선대 회장 때부터다. 노보텔 강남은 지금도 틈새시장의 대명사로 불린다. 93년 강남에 개관하자마자 현재까지 평균 객실 판매율이 94%에 이른다. 비수기인 겨울을 빼면 봄부터 가을까지 방이 꽉 찬다는 뜻이다. 이런 독보적인 프로젝트가 이비스까지 이어진 것이다. (웃으며) 덕분에 업계 선두주자 소리를 듣는다." -새 프로젝트의 성공 관건은. "수요 파악과 타이밍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역시 서비스다. 모든 신규 프로젝트는 처음 계획한 것보다 서비스를 한 단계 높였다. 노보텔은 비즈니스호텔이지만 유럽의 고급 호텔이란 느낌을 받는다. 이비스는 객실 크기와 인테리어를 극도로 단순화하고 룸서비스도 없다. 그러나 밀도 있는 공간 디자인으로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나중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서 회장은 7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친의 뜻에 따라 호텔에서 일을 했다. 룸서비스도 하고 프론트에서 허드렛일도 거들었단다. 유학 시절엔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1년간 근무한 경험도 있다. "아버지께서 '무조건 최고급 프랑스 식당에서 경험을 쌓아라'고 지시했다. 당시만 해도 고급 호텔의 상징은 프랑스 식당이었다. '앙드레'라는 식당에서 일했다. 하루 9~10시간 서서 일하면서 양파 깎고 양념통 옮기는 일을 했다. 현장 감각을 익히는 데 엄청나게 도움이 됐다. 물론 양파수프도 제대로 만들 줄 안다(웃음)." -부친에게 배운 경영 철학이 있다면. "돌아가시는 날까지 한눈 팔지 않고 오직 호텔에만 매달린 분이다. 업에 대한 식견이 탁월하셨다. 당신께서 직접 정한 '빠르고 깨끗하고 맛있고 친절하게'라는 사훈은 지금 봐도 명쾌하게 호텔 사업을 설명한다." -호텔 경영에서 가장 중요하게 따지는 지표는. "숫자가 아니라 '직원 얼굴'이다. 벨보이나 프론트 등 현장 직원의 얼굴 표정 태도 말투에 호텔 성적표가 다 나와 있다.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문제가 있는 거다. 직원이 회사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고객을 만족시킬 수 없다. 사장이나 총지배인에게 '직원들이 원하는 것을 미리 파악해 원하기 전에 해주라'고 지시한다. 원하는 대로 못해줄 상황이라면 투명하게 설명하면 된다."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인재 말고 신경 쓰는 분야가 있다면. "정보기술(IT)의 접목이다. 요즘은 객실도 식당도 인터넷으로 예약하는 시대다. 유용한 마케팅 수단이기도 하다. 이 분야에 계속 투자할 방침이다. 마케팅IT팀을 별도로 만들었다." -해외 진출 계획은. "한국에선 아코르와 제휴하고 있지만 해외는 독자적으로 나갈 수 있다. 뉴욕 같은 곳에 비즈니스호텔을 인수하고 싶다. 다만 지금은 타이밍이 이른 감이 있다. 미국 기업들이 지금은 제로 금리 때문에 버티고 있지만 앞으로 1~2년 내 한계를 맞아 싼 매물이 나올 것으로 본다." -아예 다른 업종에 진출할 생각은. "나는 호텔 밖에 모른다. 호텔 연관사업 확장을 생각하고 있다. 면세점이나 웨딩 식당 프랜차이즈 등에 관심 있다. 해외 진출도 같은 맥락에서 할 것이다." WHO? 1953년 서울생. 앰배서더호텔을 창업한 고 서현수(1924~92) 회장의 장남이다. 중앙고와 동국대를 졸업했다. 가업 승계를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나 뉴욕 호텔·모텔학교를 다닌 뒤 네바다주립대의 호텔경영학과 및 경영대학원(MBA)을 마쳤다. 유학 시절 양파 깎기, 객실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하면서 밑바닥 현장업무부터 익혔단다. 재계의 유명한 와인 매니아. 프랑스 레종 도뇌를 훈장(2002년), 금탑산업훈장(2003년)을 수훈했고 세종대 명예경영학 박사학위(2004년)도 받았다. 차진용.이상재 기자

2009-11-05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12]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

김 회장과 인터뷰는 이렇게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현장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그의 경영 스타일을 엿볼 수 있었다. 쌍용건설이 입주해 있는 서울 송파구 신천동 대한제당 빌딩 10층 임원 회의실, 김 회장은 서류 뭉치 서너 개를 들고 들어왔다. 세 시간 가까이 계속된 인터뷰에서 그는 쌍용건설에 대한 ‘열정’, 한국 건설업의 진로, 쌍용그룹 해체에 대한 소회 등을 진지하게 토해냈다. 해외 부문 실적이 계속 좋아지고 있다. "해외 사업만 보면 국내 7~8위권이다. 쌍용은 일찌감치 해외에 진출했다. 우리가 미국에 진출한 해외 부동산 투자 1호 회사다. 1988년 미국 디즈니랜드 인근에 매리어트 호텔 건축을 진행했다. 이후 미국 서부에만 세 곳에 호텔을 지었다." -쌍용은 싱가포르 시장에서 특히 강하다.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작은 나라지만 연간 건설 시장 규모가 33조원에 이른다. 한국(약 110조원)에 비해 건설 단가가 높다는 얘기다. 현재 계약됐거나 시공 중인 공사만 따지면 우리가 현지에서 2위쯤 한다. 어느 나라든지 택시 운전사에게서 그 회사 얘기가 나오면 성공한 것이라고 하는데 싱가포르 택시 기사에게 '한국' 하면 삼성.현대와 함께 쌍용이 세트로 나온다." -이런 저력은 어디서 나오나. "발주처 최고 경영진에게 우리 공사 현장을 와서 보라고 권유한다. 실제로 많은 이가 한국내 우리 현장을 다녀갔다. 지하철 9호선 공사 현장에서 15㎝ 위에 3호선이 지나가고 그 위에 상가가 있다고 하자 모두 깜짝 놀라더라. 이렇게 와서 보면 '꾼'들은 그 실체를 안다. 또 공사 수주전이 있을 때는 직접 발로 뛴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레드 카펫 깔아놓고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일 처리는 아래서 다 해놓고 나중에 회장이 와서 폼 재게 하지 말라는 뜻인데 어려운 일이 생길수록 같이 뚫어야 한다. 대형 공사 수주 영업을 할 때는 지금까지 실적은 물론 개인 이력서 회사 조직도 주주 구성까지 모두 공개한다. 2조원 가까이 매출을 올리는 회사의 단출한 조직에 발주처가 또 한번 놀란다. 10여 년 전부터 1인 다역을 해내고 있어서다." -82년 이후 그룹 회장을 맡았던 4년여를 빼면 줄곧 건설업만 하고 있는데. "할 줄 아는 게 이것 밖에 없다. 건설업은 실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웃으면서) '그거 내가 한 거야'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건설업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정보기술 제품이 기술과 마케팅을 앞세워 삽시간에 세계 시장을 휩쓸 수는 있다. 건설업은 그게 절대 안 된다. 실적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입찰에 초청도 받지 못한다. 지금도 건설협회에서 시공능력 순위를 매긴다. 정부나 단체에서 순위를 매기는 업종이 어디 또 있나." -건설업을 '피플 비즈니스'라 정의했는데. "'사람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는 비즈니스'라는 뜻이다. 건설은 혼자 잘나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팀으로 가야 한다. 요즘은 팀워크는 기본이고 각 분야에서 우수한 인재가 리드도 해야 한다."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건설업은 어떻게 포지셔닝해야 하나. "미국에서 발행하는 ENR이라는 건설 전문지에서 지난 8월 전 세계 건설사를 대상으로 자국을 제외한 해외 사업의 수익성을 평가한 적이 있다. 1~5등까지 선진국 업체가 차지했다. 현대건설이 52위 삼성엔지니어링이 53위였다. 쌍용은 93위였다. 자동차나 조선은 빅5 안에 들고 있는데 건설업은 왜 안 되나. 이것이 우리의 숙제다." 그제야 김 회장은 들고 온 서류 뭉치를 꺼냈다. 선진 건설 업계의 신경영 트렌드 친환경 건물의 경제성 등에 대한 자료였다. "요새 건설업은 EPC(Engineering Procurement & Construction)가 대세다. 설계부터 구매.시공 등 모든 과정을 일괄 수행하는 것이다. 해외 건설.플랜트 시장의 70~80%가 이렇다. 그런데 이젠 EPC도 리스크가 있어서 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난달 인천대교 건설 투자를 성사시킨 영국 에이맥(AMEC)의 사미르 브리코 회장을 만났는데 '이제는 국가 단위의 건설 프로젝트 컨설팅 쪽으로 간다'고 말하더라. 캐나다에선 오일샌드(중질유가 포함된 모래) 개발에 나서고 북해 유전 개발에도 투자한다." -건설업이 지식산업으로 진화한다는 얘기인가. "바로 그거다. 80년 전 뉴욕 맨해튼에 빌딩을 올릴 때나 지금이나 공법은 유사하다. 그러나 친환경 기술 금융과 연계한 비즈니스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 가령 이제 대형 건축물의 경우 LEED(미국 그린빌딩협의회에서 친환경 기준에 따라 등급을 부여하는 시스템) 인증이 없으면 프레젠테이션도 못 한다. 크게 보면 건설업은 첨단기술의 컨버전스다." -한국은 무엇이 더 필요한가. "경험과 네트워킹 분석.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파이낸싱 능력도 아쉽다. 쉽게 말해 시골 유치원 공사하던 업자가 수도권에 아파트 짓겠다고 하면 은행에서 돈을 빌려주겠나." 다시 화제를 쌍용으로 돌렸다. 쌍용은 도로.지하철 등 토목 공사는 물론 '예가'라는 브랜드로 주택 사업에도 진출해 있다. 김 회장은 한국과 해외 사업 비중이 55대 45쯤 된다고 소개했다. -올해 실적을 전망하면. "회계 기준을 보수적으로 잡고 있다. 2조원을 넘길 수도 있겠지만 1조8000억원으로 했다. 2015년까지 업계 7위 수주 9조원 매출 7조원 영업이익 7%를 내는 것으로 목표를 잡았다. 그래서 '7977'인데 잘될 것이다." -워크아웃 겪을 때 고충이 많았겠다. "특히 한국내 재개발.재건축 사업에서 '내일 모레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회사'라는 흑색선전이 극심했다. 이런 악조건에서 싸워야 했다. 그나마 인수합병(M&A)이 다반사인 해외에서는 사정이 나았다. 아까 말한 대로 주주 명부까지 가져가 회사 사정을 설명했는데 대개는 쉽게 이해하더라." -쌍용은 한때 한국내 4위 재벌이었으나 외환위기를 견뎌내지 못했다. "나는 그룹의 회장을 지내기도 한 사람이다. 패장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기업의 속성상 흥과 망이 있다. 쌍용은 다만 나름대로 '모범답안'이었다고 생각한다. 외환위기 직후 당시 정부가 내놓은 방안대로 쌍용의 해체가 진행됐다. 자발적 M&A 외자 유치 워크아웃의 수순을 따랐다. 쌍용양회는 태평양시멘트 에쓰오일은 아람코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쌍용자동차는 3조4000억원 부채 중 1조7000억원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대우에 넘겼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친형인) 김석원 당시 그룹 회장은 정도를 따랐다." WHO? 1953년 대구생. 쌍용그룹 창업주인 고 성곡 김성곤 회장의 차남이다. 대광고,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77년 쌍용 기획 조정실에 입사해 쌍용건설 이사(82년)를 거쳐 83년 서른 살의 나이에 이 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건설업계 오너 모임엔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고 조정구 삼부토건 회장 등이 참석할 때라 그는 항상 말석에 앉던 ‘막내’였단다. 98년 그룹이 무너졌으나 임직원의 간청으로 쌍용건설을 맡았고 직접 발로 뛰는 영업으로 회사가 워크아웃에서 벗어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 몇 안 되는 재계 인물이기도 하다. 나무가 많은 길을 걷는 게 스트레스 해소 비법. 과천 삼림욕장, 우면산, 구룡산 등을 주로 찾는다. 허귀식.이상재 기자

2009-10-29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11]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

한국 여성 저력 일깨워준 박세리·김연아처럼 여성 경영인의 모범될 것 20년째 사업을 해온 그는 ‘김성주’라는 브랜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김 회장이 경영하는 회사도 마찬가지다. 서울 청담동에 있는 명품 브랜드 MCM 매장은 온통 ‘MCM’으로 도배돼 있다. 캐나다에서 공수해 온 먹는 샘물에도, 일회용 종이컵에도 MCM 로고가 반듯하게 찍혀 있다. 이 회사가 얼마나 브랜드 경영에 공을 들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 회장은 “자체 평가한 결과 MCM 브랜드 가치는 3500억∼4000억원”이라며 “조만간 1조원짜리 회사를 만들 것”이라고 자신했다. MCM 브랜드의 글로벌 사업과 막스앤스펜서 브랜드의 한국내 유통 사업을 하는 성주그룹은 올해 2400억원대 매출을 전망하고 있다. 그는 5~6년 내 매출 1조원 달성을 자신했다. -브랜드에 왜 그렇게 열정을 쏟나. "부즈앨런&해밀턴이 한국 경제를 가리켜 '고기술'의 일본 '저가격'의 중국에 밀려 넛크래커(호두 깨는 기구)에 끼인 상태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게 10여년 전인데 지금은 상황이 더 나빠졌다. 조만간 미국.유럽 등과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다. 여기서 한국이 살 수 있는 길은 기술과 브랜드 뿐이다. 5~7년 안에 승부를 내야 한다." -브랜드 경영에 눈뜬 것은 언제인가. "1990년대 초 한국에서 구찌.이브생로랑.막스앤스펜서 같은 명품 브랜드를 들여와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원가가 같은 5만원인데도 어떤 제품은 10만원 받기도 힘들다. 그러나 구찌 브랜드만 붙이면 100만원 가격표를 붙여도 수긍을 한다. 94년 구찌가 증시에 상장할 때 매출이 3000억원대였다. 그런데 브랜드 가치는 4조원이란 평가를 받았다. 지금 이 회사의 브랜드 가치는 81억달러(약 9조4000억원)에 달한다. 여기서 브랜드의 힘을 봤다." 김 회장이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2005년 3월 독일의 명품 브랜드 MCM을 인수하면서부터. 76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나 견고하고 실용적인 여행 가방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MCM은 90년대 중반만 해도 3억5000만 유로의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경영 부실로 스위스 투자회사로 넘어가면서 사세가 크게 위축됐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김 회장은 한국 매출을 계속 늘려나가 MCM 매출의 3분의 2를 올리는 경영 능력을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스위스 투자회사와 담판을 벌여 MCM의 글로벌 사업권을 확보하게 됐다. MCM은 지난달 미국의 명품 백화점인 '삭스 피프 애비뉴'의 뉴욕 본점을 비롯한 전국 15개 점포에 입점하는 개가를 올렸다. -MCM 인수 후 어떤 일을 했나. "일단 '대청소'가 필요했다. 인수 당시 MCM은 세계 130여 나라에 진출해 있었는데 2006년까지 모두 문을 닫았다. 내부 정비가 끝나면서 2007년부터 다시 공격적으로 매장을 개설했다. 정말 '정신없이' 달려왔다. 지금까지 유럽과 미국.아시아 등 40여 국가에 300여 판매망을 확보했다. 마케팅 방법도 달리했다. '명품은 비싸야 잘 팔린다'는 통념을 깼다.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가치 있는 소비를 지향하는 전문직 여성을 겨냥한 것이다. 21세기형 새 럭셔리 소비층인 이들을 우리는 '리얼 우먼'이라고 부르는데 MCM의 주요한 타겟이다." -MCM의 삭스 피프 애비뉴 입점 성적은 어떤가. "아주 성공적이다. 전시품 판매율이 20%를 넘어 재주문에 들어간 제품이 많다. 입점한 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브랜드가 됐다. 온라인 매장 판매율은 35%로 더 높다." -온라인 시장도 적극 공략한다. "현재 매출 중 온라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정도 된다. 앞으로 수년 내 그 비중이 40%로 커질 것이다. 20년쯤 지나면 오프라인과 온라인 매출이 역전될 것이다." -삭스 피프 애비뉴에 입점 당시 향후 5~7년 내 루이뷔통을 따라잡겠다고 선언했다. "루이뷔통 매출의 60~70%가 아시안에 의해 일어난다. 다른 명품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아시안의 정서에 맞는 명품을 만드는 데 자신 있다." -CEO가 권한 위임을 하면 부담을 줄일 수 있지 않나. "중소기업이 글로벌 경영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력도 경험도 부족하다. 대신 우리는 치열함으로 승부한다. 그런 만큼 CEO가 먼저 뛰어야 한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런던.뉴욕.도쿄 사무소 책임자가 모두 '한국인 워킹맘'이다. 이게 너무 자랑스럽다. 명품 브랜드 CEO가 바쁜 또 다른 이유는 업의 특성 때문이다. 패션은 디테일이 요구되는 산업이다. 너무 변화무쌍해서 수시로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디테일을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펑크가 난다. 리더가 현장을 모르면 회사가 죽는다." -힘들 때도 있었을 텐데. "외환위기 때가 가장 힘들었다. 수입업을 하는데 원화 가치가 급락하다 보니 유동성 위기에 몰릴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구찌 본사에 한국 사업권을 팔아 280억원을 확보한 덕에 위기를 넘겼다. 구찌 브랜드의 한국 매출을 세계 5위 규모로 키워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업을 공개할 계획은 없나. "앞으로 5~6년 안에 증시에 상장할 생각이다. 돈을 벌면 사회공헌 활동 특히 북한 여성과 아이를 돕는 데 쓰고 싶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에 김 회장은 미국 유학을 떠날 때 결혼을 할 때 집안의 심한 반대를 이겨내야 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자기 이름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 "(웃으면서) 사업을 시작할 때 아버지도 그런 질문을 하시더라. 그래서 '외국에선 자기 이름으로 사업하는 경우가 흔하다. 내 꼬리표를 달고 자존심 있게 사업을 해 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대성집 딸'로 불렸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대중에게 내 이름을 기억하게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임종할 때쯤 아버지께서 '사업가의 피는 너에게 다 물려준 것 같다'고 하시더라. 너무 감사했다." -내년이면 사업을 시작한 지 만 20년이 된다. 스스로 성공했다고 자부하나. "아직은 아니다. 다만 바빠진 것은 맞다. 박세리를 보면서 한국의 많은 소녀들이 골프를 배웠고 김연아를 보면서 피겨 스케이팅에 도전하고 있다. 나도 그런 역할을 했으면 한다. 한국 여성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고 싶다. 내 꿈은 한국을 글로벌 패션 축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이 세계 패션의 중심이 되는 게 가능할까. "세계 패션의 중심이 프랑스 파리에서 이탈리아 밀라노로 옮겨온 게 24년 전 일이다. 이제는 아시아가 그 중심이 될 수 있다. 전 세계 명품의 3분의 2를 아시안이 구입한다. 그래서 글로벌 명품 브랜드를 아시아 기업들이 속속 인수하고 있다. 명품 가방으로 유명한 영국의 멀버리는 싱가포르의 클럽21이 프랑스 랑방은 대만 왕패밀리가 인수했다. 이것이 트렌드다. 아시아에 본거지를 둔 MCM은 수시로 아시안이 원하는 신제품을 낼 수 있다. 또 한국의 정보기술(IT)을 패션에 접목하면 놀라운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성주그룹의 성공 스토리가 하버드대 교재에 실린다고 들었다. "올 초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글로벌 강소기업 11개를 선정해 성공 사례를 교재로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몇 차례 인터뷰를 했다. 내년 6월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여성의 사회 참여를 강조한다. "이제 글로벌 경쟁력은 제조업이 아니라 지식 기반의 서비스업에서 나온다. 여기에 여성이 딱 맞는다. 지능지수(IQ)와 감성지수(EQ)를 더한 것이 바로 여성지수(WQ.Woman Quotient) 아닌가. 여성 인력을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글로벌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뜻이다." WHO? 1956년 대구생. 고 김수근(1916∼2001) 대성그룹 명예회장과 대한기독교절제회장을 지낸 고 여귀옥(1926∼2006) 여사 사이에서 3남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이화여고와 연세대 신학과를 나와 애머스트대 사회학과, 영국 런던정경대 대학원을 수료했다. 글로벌 기업인으로 변신한 지금은 ‘칭기즈킴’으로 불리지만 초등학교 때 별명은 ‘잔다르크’. 서울 사직동에 있던 시립아동병원을 찾아 학용품을 나눠주는 등 남모르게 봉사활동을 해 붙은 것이다.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국제결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블루밍데일 백화점에 입사했는데 여기서 구박도, 차별도, 무시도 많이 당했단다. 이게 결국 피와 뼈와 살이 돼 패션 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90년 고 김 회장에게 3억원을 빌려 ㈜성주를 세우면서 사업가로 나서 오늘날의 성주그룹을 일궜다. 차진용.이상재 기자

2009-10-22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10]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2000년 4월 충남 천안 교보생명 연수원(계성원). 대강당을 가득 메우고 전략회의를 열고 있던 교보생명 임직원들이 웅성거렸다. 한창 강연 중이던 신창재 회장도 연설을 중단했다. 대형 스크린에선 ‘교보생명 부도’라는 자막과 함께 앵커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내는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잠시 뒤 가상 뉴스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신 회장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극비리에 준비한 ‘깜짝쇼’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웃지 않았다. 그만큼 교보는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98년 외환위기 후 2~3년 동안 자산운용 손실은 2조4000억원에 달했다. 창사 40여년 만에 맞는 최대 위기였다. 신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변화와 혁신이 아니면 죽는다”고 역설했다. 이후 9년, 교보의 상황은 극적으로 변했다. 교보는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2916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교보는 98년 외환위기와 최근 세계 금융위기라는 두 번의 큰 위기를 잘 건너왔다. 감회가 남다르겠다. "외환위기 때는 참 아슬아슬했다. 다른 회사는 공적자금도 받았지만 우리는 홀로서기를 하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다. 그게 회사와 나를 채찍질했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회사의 체력이 단련됐다. 2~3년 전 시장이 변액보험 위주로 쏠릴 때 내부에선 '우리는 왜 적극적으로 하지 않느냐'는 불만도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잘하는 것만 하자고 했다. 그래서 보장성 보험에만 집중했다. 금융위기가 오자 '우리의 전략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됐다."(교보는 올해 4~6월에도 896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외환위기 때는 자산운용에서 대규모 손실을 보는 바람에 매우 어려웠다. 지금은 어떤가. "최근 5년 동안 대형 3사(삼성.대한.교보생명) 중 자기자본 이익률(ROE)은 우리가 가장 높다. 특히 지난해는 엄격하게 위험관리를 했던 게 주효했다. 우량자산 중심으로 잘 아는 곳에만 투자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많이 버는 것만큼 잘 지켜내는 것도 중요하다." 기업의 수익성을 평가하는 지표인 ROE는 회사가 빚이 아닌 투자자의 돈(자기자본)으로 얼마나 많은 이익을 올렸는지 보여준다. 교보의 최근 5년간 ROE는 평균 22.2%에 달했다. 1000원을 투자하면 222원을 벌었다는 뜻이다. 반면 경쟁사의 ROE는 대개 10% 전후에 머물렀다. -2015년까지 자산 100조원 달성이란 목표를 제시했는데. "외형 성장에 초점을 두겠다는 뜻은 아니고 목표가 그렇다는 의미다. 물론 외형도 중요하지만 수익성이 없는 외형은 거품이다. 외형도 챙기고 수익성도 높이고 고객도 만족시키고 사원.투자자에게도 좋도록 균형을 맞춰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회사에선 이를 '좋은 성장'이라고 말한다." -기업이 돈도 벌고 이해 관계자를 모두 만족시킨다는 것이 양립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 "기업의 책임은 성장 단계에 따라 달라진다. 1단계는 돈을 벌어 사원들이 먹고 살고 고객과 투자자에게 도움을 주는 '경제적 책임' 단계다. 이를 넘어서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법규와 제도를 정직하게 준수하는 '윤리적 책임'의 2단계가 나온다. 마지막 3단계가 사회공헌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공헌 책임'이다. 우리 회사는 앞의 두 단계는 넘었고 이제 사회공헌 책임 단계에 왔다. 물론 기업은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다. 돈도 못 버는데 사회에 공헌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고객사들에 '다윈(DA-Win)'이란 이름으로 고객만족 컨설팅을 하고 있다. 반응이 좋다고 들었다. "고객만족 경영에 힘쓰다 보니 능률협회에서 5년 연속 대상을 받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이후 고객만족 경영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다른 회사와 노하우를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무료다. 경찰청.국세청 같은 공공기관을 시작으로 병원.일반기업 등에 서비스 차원으로 컨설팅을 해드린다. 이것이 보험계약과 연결되기도 하니 회사로선 선순환이다. 담당 컨설턴트가 24명이 있는데 해달라는 곳이 많아 아우성이다." -선친(신용호 창립자)에 이어 교보의 CEO를 맡은 게 10년째다. 이제는 (보험)업에 대한 나름의 관이 생겼을 것 같다. "2000년부터 전문경영인과 파트너로 경영했고 단독 대표이사로 책임을 맡은 것은 2006년부터다. 2000년에는 약 1년6개월 동안 모든 임직원이 머리를 맞대고 우리 업의 본질이 뭔지 고민했다. '만일 우리 회사가 사라지고 생명보험이 없어진다면 이 사회는 무엇이 아쉬워질까'하고 물었다. 그때 만든 것이 '우리의 사명은 모든 사람이 미래의 역경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도와드리는 것입니다'라는 교보인의 비전이다. 보험의 요체는 결국 '사랑과 정의'다. 윤리경영이나 사회책임.지속가능 경영이란 것도 다 같은 뜻이다." -경영 스타일에선 감성적이라는 평이 많다. 직원들 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도 하고 장애인 체험이나 자원봉사도 열심인데. "나는 로봇이다. 밑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한다.(웃음) 사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 무슨 일이든 하게 된다. 다른 회사에선 회장이라면 제왕처럼 통치하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본다. '황제 경영'으로 회사가 유지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나라면 그런 회사엔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회장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카리스마가 강하면 직원들이 회장의 눈치를 보지 회사의 발전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런 회사는 오래가지 못한다." -술.담배.골프를 끊었다고 하던데. "술은 원래 즐기는데 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위장병이 생겼다. 골프는 선친이 돌아가시고 LG카드 문제 같은 복잡한 일들이 한꺼번에 겹쳐 시간을 내지 못했다. 앞으로 여유가 생기면 골프는 좀 치려고 한다. 요즘엔 헬스클럽에서 뛰거나 근육운동을 한다. 근육운동을 하다 보면 수축과 이완의 조화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경영도 마찬가지다. 한쪽 근육만 챙기면 꼭 몸살이 난다. CEO는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외줄 타기를 하는 균형의 예술가와 같다. 끊임없이 조화와 균형을 생각해야 한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2006년 무렵이다. 암보험 등 건강보험 상품에서 엄청나게 많은 돈이 부당하게 새고 있었다. (암에 걸린 뒤 이를 숨기고 보험에 드는 식의) 부당 가입자도 많았고 잘못 지급되는 보험금도 많았다. 업계 전체로 보면 이렇게 누수되는 돈이 한 해에 3조원 정도 된다." -은행업에도 관심이 있다고 했는데. "은행을 하면 방카슈랑스 등 고객 확보에 시너지(상승) 효과가 있다. 그러나 기회가 쉽게 올지는 모르겠다. (은행 인수를 위한) 돈은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무디스가 평가한 우리 회사의 신용등급은 A2로 국가 신용등급과 같다. 지난해 금융위기에도 등급이 내려가지 않았다. 이 정도면 해외에서 상당히 좋은 조건에 자금을 빌릴 수도 있고 컨소시엄으로 투자자를 유치할 수도 있다. 금융은 신용이기 때문이다." -교보생명의 2대 주주인 대우인터내셔널이 최근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경영권 유지는. "어떤 주주가 올까 하는 관심을 갖는 정도다. (지분이 충분해) 경영권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 Who? 1953년 서울생. 고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장남이다. 경기고,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서울대병원에서 산부인과 교수 겸 의사로 근무했다. 96년 부친의 권유로 의사·교수를 그만두고 교보생명 이사회 부회장을 맡아 경영 수업을 시작했다. 2000년 대표이사 회장을 맡아 회사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인간적인 친근감이 느껴지는 따뜻한 리더심으로 착실한 성장을 이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보생명이 세운 공익재단인 대산문화재단의 이사장도 맡고 있다. 이정재.주정완 기자

2009-10-15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9] 윤도준 동화약품 회장

윤도준(57) 동화약품 회장은 소탈했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 순화동 본사 3층 회의실에 들어선 윤 회장은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양복 상의를 입어 달라고 요청하자 "벗는 게 편하지 않나요"라고 되묻기도 했다. 윤 회장은 인터뷰에 앞서 교수 출신답게 회사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강의부터 했다. 그는 "1897년 동화약품이 수렛골(순화동의 옛 이름)에서 창립해 112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운을 뗐다. 이어 "숙종의 정비인 인현왕후 민씨의 생가가 있던 곳이 바로 이 자리"라며 "고종 때 궁중 선전관을 지낸 민씨 집안의 민병호 선생이 궁중 비방과 양약의 장점을 취해 개발한 최초의 한국산 신약 '활명수'를 생산하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동화약품은 두산과 함께 창업 100년을 넘긴 기업이다. 두산은 1896년 종로에서 포목상으로 문을 연 박승직 상점이 모태다. 설립연도는 두산이 한 해 빠르지만 학자에 따라선 같은 자리에서 한 업종(제약)과 제품(활명수)을 이어온 동화약품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보기도 한다. 윤 회장은 "우리 회사의 행보가 한국 기업사의 이정표가 됐던 적이 많다"며 "최근 10년간 매출이 정체 상태지만 다시 도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9월25일은 이 회사 창립 112주년 기념일이었다. -동화약품이 장구한 세월을 이어온 비결은 뭔가. "민족기업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고 윤리경영으로 신뢰를 얻은 덕분이다. (회사 로고인 빨간색 합죽선을 가리키며) 저 부채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시경'에 '종이와 대나무가 서로 합하여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는 말이 출전으로 '민족이 합심하면 잘살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초기 경영진 중엔 독립운동을 한 분이 많다. 창업자 민강 선생의 사망으로 회사가 위기를 겪자 민씨 집안의 부탁으로 할아버지 보당 윤창식 사장이 37년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당시 이미 정도.책임경영과 봉사정신의 경영철학을 내세울 정도로 윤리경영의 전통도 강하다." -오랜 역사와 전통이 때로 타성이나 정체의 원인이 될 수 있지 않나. "사람도 나이가 들면 고집이 세지고 변화에 둔감해진다. 그런 점에서 변신이 필요한 시점이 왔다. 나는 밖에 있다 왔으니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이전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확실해졌으니 변화와 혁신이 절실하다. 창립기념식에서 현재 동화호가 위기라는 것을 강조했다. 2005년 부회장 취임사 이후 처음으로 전 직원을 모아놓고 말한 것이다." 윤 회장은 동화약품 부회장을 맡기 전까지 교수(경희대 의대)로 재직하면서 회사 경영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윤광렬 명예회장)가 의대를 보낸 데는 어려운 회사 일을 맡기지 않으려는 뜻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밖에서 보니 변화의 활력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동생(윤길준 부회장)과 상의해 경영에 참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윤 회장은 전문경영인인 조창수 사장과 함께 각자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윤 회장은 회사 주식의 5.13%를 보유한 개인 최대주주이고 윤광렬 명예회장은 3.03% 윤길준 부회장은 1.89%의 지분을 갖고 있다. -최고경영자(CEO)가 된 이후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일은. "직장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었다. 처음 와보니 너무 경직돼 있었다. 열심히는 하는데 효율적이지 않고…. 특히 웃음이 없었다. 정해진 근무시간은 8시간인데 12시간씩 근무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렇게 자기 생활이 없으면 행복한 직장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탄력근무제를 도입하고 퇴근시간 후에 회사에 남으면 쫓아내게 했다.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젊은 직원들을 모아 학습조직을 꾸리고 다양한 분야의 외부 강사를 초청해 특강을 열고 있다." -외형상 후발 업체에 추월당했다. "10년 전만 해도 최상위권을 유지했으나 2000년 의약분업이 고비가 됐다. 남들이 전문의약품(ETC)으로 치고 나갈 때 일반의약품(OTC)만 고수한 것이 승부를 갈랐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 덩치를 중시하는 사람에겐 바퀴벌레와 맘모스의 예를 들고 싶다. 바퀴벌레는 작아도 수억 년을 생존해 살아있는 화석이 됐지만 맘모스는 멸종해 죽은 화석으로만 남았다. 외형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지만 결코 무리는 하지 않는다." 동화약품은 2008 회계연도에 매출 1886억원 순이익 285억원의 실적을 올렸다. 매출액 기준으로는 제약업계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상태다. -경영 참여 후 보람된 일이 있다면. "골다공증 치료제 신약 기술 개발이다. 2007년 미국 P&G에 5억1100만 달러의 기술 수출 계약을 했다. 한국 제약업계 사상 최대 규모다. 지난해엔 추가로 일본 데이진제약과 9700만 달러의 기술 수출 계약도 성사시켰다. 올 5월 충북 충주에 1300여억원을 들여 cGMP(우수의약품 제조관리 기준) 공장을 준공했다. 부지 면적이 8만여㎡로 단일 생산시설로는 국내 제약업계 최대 규모다. 연말까지 경기도 용인에 중앙연구소(부지 면적 2만2000㎡)도 준공할 예정이다." -신규 사업 진출이나 구조조정은. "우리는 본업에 충실하지 벌이는 체질이 아니다. 인원 정리 같은 구조조정은 외환위기 때도 없었다. 오히려 경력사원을 많이 뽑았다. 인사.마케팅.기획 같은 핵심부서부터 시작했다. 대개 첫 직장으로 들어와 정년까지 가는 보수적인 조직에 메기 역할을 해 건강한 긴장감을 불어넣으려는 것이었다. 예전에도 경력사원이 있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제는 직원의 20% 정도가 경력사원이고 회사 창립 이후 처음으로 여성 임원도 두 명 나왔다." -경영 노하우를 어디서 얻나. "전성철 이사장이 운영하는 세계경영연구원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 좋은 책을 함께 읽고 강의도 듣는 MMP라는 교육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있다. 새로운 길을 갈 때는 책이 제일 확실한 스승이다. 고교 시절부터 책 구입광이다. 내 방에 가면 네 면에 책장이 있고 그중 한 면은 이중 책장이다. 온라인 서점을 주로 이용하는데 워낙 많이 사니까 VIP 회원이 됐다. 임원들과 함께 읽으며 공부도 하고 신입사원이 오면 한두 권씩 주기도 한다." 윤 회장은 도서관을 연상케 하는 회장 집무실도 공개했다. 특이한 것은 서서 책을 보는 독서대였다. 그는 "앉아서 책을 읽다 보니 자꾸 졸려서 독서대를 샀다"며 "내 방을 언론에 공개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최근에 읽은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무엇인가. "'야마다 사장 샐러리맨의 천국을 만들다'와 '주켄 사람들'이다. 직원이 행복한 회사가 좋은 회사라는 소신을 가진 일본 경영자들에 대한 책이다. 미라이공업의 야마다 사장은 연극배우 출신인데 출근하면 온종일 '어떻게 하면 직원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만 생각한다고 한다. 배우가 신이 나지 않으면 관객이 감동할 수 없다는 현장 경험에서 이런 철학이 나왔다고 한다. 직원이 신나게 일해야 서비스가 좋아지고 단골고객도 생긴다는 것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WHO? 1952년 서울생. 가송 윤광렬 동화약품 명예회장의 장남. 서울고를 나와 경희대 의대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안동.충주의료원 정신과 과장을 거쳐 경희대 의학과 신경정신과학교실 교수 경희대 병원 정신과 과장을 역임했다. 2005년 3월 동화약품 부회장에 취임했으며 같은 해 5월 대표이사가 됐다. 2008년 2월 윤광렬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자 대표이사 회장을 맡았다. 3세 경영인으로서 조용하고 내실 있게 기업을 이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주정완 기자

2009-10-08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8] 구자열 LS전선 회장

세계 3위 리더십 구자열 회장. 2000년대 초 내수 정체로 LS전선의 매출은 4년째 2조원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이 회사는 지난해 자회사를 포함해 7조원대 매출을 올려 세계 3위 업체가 됐다. 구자열 회장의 글로벌 전략 덕분이다. "중국은 세계 전선 수요의 24%를 차지하고 있다. 성장률도 연 15%에 이른다. 그래서 이번 훙치전기 인수는 아주 만족스럽다. 훙치전기가 이름 그대로 '홍기(붉은 깃발)'가 돼 LS전선과 시너지를 낼 것이다." 경기도 안양에 있는 LS전선 본사에서 만난 구자열(56) LS전선 회장은 바로 전날 중국에서 돌아왔다고 했지만 전혀 피곤한 기색이 아니었다. 목소리엔 의욕이 넘쳤다. LS전선은 지난달 1일 중국 전선업체 훙치전기의 지분 75.14%를 1억900만 위안(약 200억원)에 인수했다. 구 회장은 14~17일 중국 현지 임직원을 격려하고 돌아왔다. 그는 "훙치전기 인수를 기반으로 조만간 중국 1위 나아가서는 세계 1위 전선업체로 도약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언제부터 중국 업체 인수에 관심을 가졌나. "베트남.러시아.인도.중국.미국 등 'VRICA' 시장을 전략적 타깃으로 설정한 다음 그린필드(직접 시설 투자)냐 M&A냐를 놓고 고민했다. 중국은 M&A로 가닥을 잡았고 한 업체와 딜(거래)을 진행했는데 채권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결렬됐다. 이 딜이 결렬된 뒤 훙치전기를 알게 돼 인수하게 됐는데 가능성이 꽤 큰 회사다." -중국 출장 기간 중 '중국에서 1등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목표는 항상 1등이다. 그리고 아주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다. 중국에서 1등을 하면 세계 1등에 가까워진다. 중국은 세계 전선 수요의 24%를 차지하고 있다. 내로라하는 글로벌 플레이어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도 사생결단 목숨 걸고 하는 거다."업계에 따르면 중국은 전선 제조업체가 3000개가 넘는다. 상위 5개 업체 점유율을 모두 합쳐도 6%가 안 될 만큼 주도 기업은 없는 실정이다. 훙치전기는 5위권 밖이지만 성장 가능성이 큰 회사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에 해외 네트워크를 많이 늘렸다. "한국에서 LS전선은 확고부동한 1등이다. 그러나 성장세가 정체된 상태였다. 물이 고이면 썩는 것 아니냐. 2001년 회사에 와 보니 매출이 4년째 1조9000억원대였다. 성숙 산업인 탓이었다. 서둘러 해외로 나가야 한다고 채근했다. 특히 중국 시장이 급팽창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진출이 늦었다. 마침 경쟁사가 중국에 진출했다가 실패해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무조건 나가라'고 떠밀었다. 다행히 나는 백그라운드가 상사맨이다(LG상사가 그의 첫 직장이다). 미국에서 옷 장사하는 것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 지역장 시절엔 본사를 거치지 않고 중국.러시아에서 상품을 떼어다 일본에 파는 '이상한 짓'도 벌였다.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됐다." -LS전선의 글로벌 전략이 무엇인가. "처음엔 '무조건 반반'이었다. 한국 매출 해외 매출이 절반씩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동안 (주요 한국내 수요처인) 한전.KT만 바라보고 영업을 했다. 경쟁이 심해지면서 당연히 마진이 줄었다. 살 길을 해외에서 찾아야 했다. 지난해 미국의 슈피리어에식스(SPSX)를 인수하면서 그 '반반'은 완전히 넘어섰다." 지난해 7월 LS전선은 9억 달러를 투자해 북중미 1위 산업용 전선업체인 SPSX를 인수했다. 애틀랜타에 본사가 있는 SPSX는 80여년 역사의 전선 전문기업이다. 이를 계기로 SPSX.JS전선 등 출자회사를 포함한 LS의 전선 부문 매출은 7조3000억원을 넘어섰다. 프랑스 넥상스 이탈리아 프리즈미안에 이어 세계 3위 전선업체로 발돋움했다. -새로운 목표를 제시할 시점 아닌가. "당연히 세계 1등이다. 지난해 SPSX를 인수하면서 '해보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세계 1위가 되는 시기를 언제로 잡나. "(머뭇거림 없이) 2015년이다. 물론 1 2위 회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빅2와 비교해 아직은 격차가 있다. 그러나 우리도 열심히 할 것이다." -지금까지 M&A에만 1조원대 자금이 들어갔는데 자금 사정은 괜찮나. "SPSX를 인수하면서 부채비율이 400%대로 높아졌다. 대신 지주회사는 빚이 거의 없다(지난해 7월 LS전선은 존속 법인인 지주회사 LS와 사업 자회사인 LS전선.LS엠트론으로 분리했다). 지주회사는 여차하면 다른 곳에 투자를 해야 해서 그렇다. LS전선 스스로 파이낸싱을 하고 있는데 크게 문제없다. (창밖 공장을 가리키며) 안양.군포 공장 매각을 추진 중이다. 공시지가로만 군포 공장이 3500억원 안양 공장이 2000억원이다. 이 땅만 팔아도 차입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올 2월 한전이 발주한 전남 진도~제주 간 해저 케이블 수주에 성공했다. "국제 해저 전력망 입찰에서 한국 업체가 수주한 첫 번째 사례다. 우리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는 것이다. 수입 대체는 물론 세계 시장 진출도 기대할 수 있다. 그동안 해저 케이블은 넥상스.프리즈미안과 스웨덴의 ABB 등 3사가 1조5000억원대 시장을 독식하다시피하고 있다." 해저 케이블은 '전선의 꽃'으로 불린다. 해저 구간을 하나의 케이블로 연결하는 것으로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LS전선은 4년여 투자 끝에 초고압 해저 케이블을 개발하고 다음 달 강원도 동해에 해저 케이블 공장을 준공한다. -이 사업에 의지가 강했다고 하던데. "임원들에게 '제주 건을 놓치면 앞으로 10년간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며 총력을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다. 기술진에겐 '성공하지 못하면 동해바다에 몸을 던질 각오로 일해 달라'고 독려했다. 우리는 배수진을 쳤고 결국 해냈다. (웃으며) 내 관상에 복이 많다고 한다." -현장을 자주 찾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큰 배의 선장과 같다. 대기업이라는 큰 배가 한 방향으로 똑같이 움직이려면 얼마나 많이 소통해야 하겠나. 10번 20번 반복하는 것으로 부족하다. 1년 내내 같은 얘기만 해야 한다. 그러면서 '혁신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No Innovation No Future)'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가장 어려운 비즈니스 결단은 무엇이었나. "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ERP)을 도입한 것이다." -굵직한 M&A도 많았는데 뜻밖이다. "처음에 ERP를 도입한다고 하니까 여기저기서 반대가 많았다. '전선을 모르는 사람이 일을 벌인다'거나 '넥상스.프리즈미안도 하지 않는데 왜 굳이 우리가 먼저 하느냐'는 등 수군대기 일쑤였다. 회사가 2년 내내 시끄러웠다. 계속 시비를 걸었지만 밀어붙였다. 기업 내부의 프로세스와 경영관리 체계를 바꾸는 것이 혁신의 첫걸음이라고 확신해서다. 또 LG를 떠나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선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달라졌나. "회사가 투명해졌다. 영국 이동통신 사업자인 보다폰이 계약에 앞서 우리 회사 ERP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체크하더라. 한 직원의 인사카드를 뽑아 실제 근무하는지 확인까지 했다. 결국 테스트를 통과해 계약이 성사됐다.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는 길이다." -지금 LS그룹은 구태회.평회.두회 명예회장 3가족의 공동 소유 형태다. 다시 분가를 해야 하지 않나.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LS는 (형제간) 같이 잘해 보자는 회사다. 구자홍 그룹 회장과는 4촌이면서 파트너다. 서로 존중해 준다. LS그룹을 키우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LS그룹은 고 구인회 LG 창업주의 셋째.넷째.다섯째 동생인 태회(86).평회(83).두회(81) 명예회장이 LG그룹에서 분가하면서 탄생했다. 2003년 LG에서 전선과 금속 부문이 계열 분리했고 2005년부터 'LS'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장남 구자홍(63) 회장이 LS그룹 회장으로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장남인 구 회장이 LS전선 회장으로 있다. WHO? 1943년 서울생. 고 구인회 LG창업주의 넷째 동생인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장남. 서울고,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와 78년 LG상사에 입사했다. LG상사 이사, LG투자증권(현 우리투자증권) 부사장을 거쳐 2001년 10월 LG전선(현 LS전선)으로 옮겼다. 지난해 말 LS전선·LS엠트론·LS니꼬동제련 회장으로 승진했다. 등산·테니스·스키 등을 즐기는 만는 스포츠맨. 산악자전거 매니아로 올 3월 대한사이클연맹 회장을 맡았다. “단순한 재미보다는 목표를 넘어섰을 때의 ‘희열’ 때문에 자전거에 매료됐다”고 말한다. 차진용.이상재 기자

2009-10-01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6]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게 차려놓은 한식상이라고 해야 할까. 인터뷰를 위해 찾은 정몽규(47) 현대산업개발 회장의 서울 삼성동 집무실은 모던하면서 정갈했다. 정 회장의 책상 위엔 '한국미의 조명(조요한 지음)'이 올려져 있었고 그 뒤엔 사진작가 구본창의 '백자' 작품이 걸려 있었다. 정 회장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하반기까지는 건설 경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며 위기 관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마침 인터뷰를 한 날 아침엔 시공능력 37위 건설업체인 현진이 최종 부도 처리됐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앞으로도 건설 경기가 어려울 것 같은가. "밑에서 불쑥 (현진 부도 같은) 일이 터진다. (건설 경기는) 계속 어렵다고 봐야 한다. 올해 하반기까지는 그럴 것 같다." -언제쯤 좋아질까. "서울 지역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지방은 찬바람이 씽씽 분다. 일부 지역 부동산 값이 회복됐다고 하지만 이 역시 거래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호가가 올라간 것 뿐이다." -지난해 매출과 이익이 줄었다. "상당히 큰 건설사들이 대주단(은행권이 결성한 채권단) 협약에 들어갔다. 이런 회사들은 대개 2~3년 전부터 인수합병(M&A) 등으로 외형을 키웠거나 시행사를 끼고 수주를 늘린 경우다. 우리는 리스크 관리를 신경 썼다. 매출은 아무래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올해 실적은 어떨 것으로 보나. "하반기에 주택 신규 분양이 여러 곳 계획돼 있고 토목.공공 부문에서 선전이 기대되는 만큼 점진적으로 실적이 개선될 것으로 본다. 해운대 아이파크 수원 아이파크 시티 등 대형 사업 매출이 본격적으로 발생하는 내년엔 더욱 나아질 것이다." 현대산업개발은 부산 해운대 경기도 수원 권선동 일대 대규모 부지를 사들여 개발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쇼핑몰.학교.공원 등의 기반시설을 갖춘 미니 신도시급 주거단지를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그는 "길게 길게 보고 사업한다"며 다른 건설사와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수원 프로젝트는 전체 규모가 3조원짜리다. 부지 매입 대금만 7000억원이 들었다. 해운대 아이파크의 경우는 2000년에 부지를 사들여 이제 사업을 시작했으니 8~9년 걸린 셈이다. 한국에는 10년쯤 걸리는 프로젝트를 하는 회사가 거의 없다. 장기 사업을 한다는 것은 천천히 굴러가도 견딜 수 있는 체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2007년 10월 10만원을 넘던 주가가 지금은 4만원대에 머물고 있다. "(웃으면서) 주식 시장은 미인대회 같아서 저 여자가 예쁘다고 하면 저 여자에게 이 여자가 예쁘다고 하면 이 여자에게 달려가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 내실이 있으면 언젠가는 올라갈 것이다." -자동차 비즈니스를 하다 건설 분야로 옮긴 지 10년이 지났다. 개인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나. "(여유 있는 표정으로)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대상이 달라졌다. 이전엔 어디에 가든지 자동차 램프나 옆모양 등을 열심히 들여다봤다. 지금은 거리 풍경을 주로 본다. 자동차는 건설과 달리 고객 반응이 상당히 빨리 오는 상품이다. 다만 5년 10년이면 없어지고 만다. 반면 아파트는 50년 100년 가는 제품이다. 더욱이 자동차는 재산 목록 2호 아파트는 1호 아닌가. 사람에게 주는 즐거움이 다르다. 건설은 긴 호흡을 갖고 하는 사업이다." -제조업과 건설업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제조업은 성과물이 집적되는 경향이 있는데 건설업은 프로젝트 하나하나가 '벤처'다. 마치 화전민이 확 불 지르고 농사지은 다음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과 비슷하다. 또 제조업은 인풋 대비 아웃풋을 정확히 체크할 수 있는데 건설업은 이게 어렵다. 철근이 하나 빠졌는지 아닌지 실제로 확인하기가 힘들다. (일일이 확인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점검한다고 해도 제대로 알 길이 없다. 사후 정정도 어렵다." -건설업 하면 '복마전' '비자금의 온상' 같은 부정적인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데. "자동차의 경우는 국제적으로 경쟁해야 한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도달하지 못하면 도태한다. 건설업은 국내 시스템에 맞춰 경쟁하다 보니 발전이 더디고 투명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고뇌도 많이 했다. 어떤 사업은 포기한 적도 있다. 비자금이 필요한 경우라면 아예 수주하지 말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건설업도 정정당당하고 투명해지는 과정에 있다. 성장이 더디더라도 내실 경영을 추구했다. 선친의 정도 경영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지난 10년을 돌이켜볼 때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2001년이다. 외환위기 영향으로 8000여 가구의 미분양 물량이 쌓여 자금난을 겪었다. 여기에다 아이타워(현 강남파이낸스빌딩)를 짓느라고 계속 투자를 해야 했다. 당시 부채 규모가 2조7000억원이나 됐다. 자금 회전이 되지 않았다." 그는 "처음 회사에 왔을 때 자금의 70~80%를 3개월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를 통해 조달하고 있었다"며 "이를 장기채로 바꾼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현대산업개발은 2001년 5월 론스타에 아이타워를 매각 6000여 억원을 조달하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아이타워를 매각할 때 아쉬웠을 것 같다. "잘 지었고 멋있는 건축물인데…. 굉장히 아까웠다. 그러나 또 지으면 되지 않나 싶었다. 또 아이타워 매각을 계기로 재무구조가 좋아져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건설이라는 업종은 유목민처럼 텐트 치고 옮겨 다니면서 '영원히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서울 용산에 아이파크몰을 운영 중인데. "처음엔 동대문 밀리오레나 굿모닝시티처럼 분양 사업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점 업소들의 영업 실태를 보니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다. 특히 연이어 있는 점포끼리 똑같은 제품을 파는 게 이해가 안 갔다.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다 편안한 쇼핑이 가능한 백화점 컨셉트로 바꾸게 된 것이다. 상권 형성이 제대로 될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30%씩 성장하고 있다. 내년에는 경상 흑자가 날 것이다." 정 회장은 재계 인사로선 드물게 '아파트 살이'를 하고 있다. 2004년 현대산업개발이 시공한 삼성동 아이파크에 입주한 것. 그는 "아파트는 연료 효율이 높고 인터넷 망을 까는 데도 유리한 측면이 있다"며 "우리가 정보기술 강국이 된 데는 아파트가 도움이 됐다"고 했다. -현대자동차가 요즘 잘 나간다. 자동차 사업에 대한 미련은 없나. "미련 같은 거 없다. 아버님(고 정세영 명예회장)께서 회사 설립부터 기반을 닦는 데 기여했고 나도 조금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만족한다." WHO? 1962년 서울생.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용산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온 뒤 영국 옥스포드대(정치학 석사)에서 유학했다. 정 명예회장이 자주 하던 ‘사람은 무조건 근면하고, 성실해야 하며, 결과도 좋아야 한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단다. 88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기획·자재·개발 부서 등을 거쳐 96년 회장까지 올랐으나 99년 3월 현대산업개발을 맡아 현대그룹에서 독립했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스키·테니스·자전거·수상스키 등을 즐기는 스포츠 매니아로 한때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차진용.이상재 기자

2009-09-17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5]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내실이 우선이다." 조동길(54) 한솔 회장이 인터뷰 내내 강조한 말이다. 그는 아무리 매력 있는 사업이라도 안 맞는다 싶으면 한눈 팔지 않겠다고 했다. 한솔의 주력은 한국 1위 제지회사인 한솔제지다. 한솔은 제지 연관 사업을 늘려가는 한편 웰빙.환경 트렌드에 맞춰 신사업에 진출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한솔은 10년 전만 해도 재계 10위권을 넘봤었다. 1991년 삼성그룹에서 전주제지(현 한솔제지)를 떼내 분리(법적 분리 완료 시점은 93년)한 이후 금융.정보기술(IT) 분야에 적극 진출한 결과였다. 하지만 너무 빠른 몸집 불리기는 97년 닥친 외환위기 때 시련으로 돌아왔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그 결과 한솔의 재계 순위는 현재 50위 밖으로 밀려난 상태다. 옛 위상을 되찾고 싶을 법도 한데 조 회장은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어렵지 않나. "우리는 특별히 어려운 게 없다. 주력 업종인 제지의 경우 수요가 20% 이상 줄어들기는 했지만 원료 가격이 많이 떨어지고 환율 효과로 수출도 잘돼 실적이 괜찮다. 글로벌 위기 이전부터 원가 절감 고객 위주 제품 생산을 강조해 온 덕분이기도 하다." -외환위기가 닥쳤을 땐 어려움이 컸었다. "삼성에서 분리를 선언한 것이 91년 법적 분리가 매듭된 것이 93년이다. 그때 자산이 8000억원 수준이었다. 이후 인수합병(M&A)을 적극적으로 해 외환위기 무렵엔 자산을 11조원까지 불렸다. 당시 매출이 4조여원 수준이었으니 재무적으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면 삼성에서 떨어져 나온 서운함 내지 불안함을 성장 욕구로 달래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당시 수업료를 꽤 비싸게 치렀다. "결국 주력인 신문용지 사업까지 매각해야 했다. 당장 돈벌이가 좋은 사업부터 팔아야 했다. 한솔제지에서 신문용지 부문을 떼내 10억달러를 유치했다. 당시로선 한국내 최대 투자 유치였다. 덕분에 유동성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한솔은 캐나다 아비티비 노르웨이 노르스케 스코그와 지분 3분의 1씩 갖는 조건으로 팬아시아페이퍼를 만들었다. 당초 아이티비와 노르스케 두 회사는 한솔과 절반씩 지분을 나눠 갖는 방안을 내놨으나 한솔이 3자 동일 지분 조건을 제시해 관철시켰다. 신문용지 세계 1 2위인 두 회사 사이에서 일종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겠다는 의도에서였다. 결과적으로 한솔은 팬아시아페이퍼의 경영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와 함께 그동안 사들였던 회사도 대거 정리했다. 특히 그룹 역량을 총동원해 따낸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을 하던 한솔엠닷컴(PCS)까지 KT에 팔았다. -위기 극복 과정에서 얻은 교훈은. "아무리 매력 있어도 '알맞은 사업'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또 재무적 안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PCS 사업이 그랬다. 업종 특성상 대규모 자금을 지속적으로 투입해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줄곧 3위로 밀려 결국 회사를 팔고 말았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M&A를 할 때는 시장에서 1.2위를 할 역량이 되는지 확실한 기술 등 차별적 우위 요소가 있는지 먼저 살피는 게 중요하다. 상대가 아무리 예뻐 보여도 과잉 레버리지(차입)는 절대 금물이다. 한 가지 더 얘기하면 최고경영인(CEO)이 신규 사업에 대해 100% 알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무식한 편이 낫다는 점이다. 전자라면 문제가 없을 테고 후자라면 전문경영인에게 맡길 수 있어서다. 적당히 안다? 비즈니스에선 이게 가장 위험하다." -지난해 이엔페이퍼(현 아트원제지)를 인수했다. "아트원제지는 우리가 인수하기 전 4년간 줄곧 적자를 냈으나 올해 흑자 전환할 것으로 기대된다.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웃으며) 경쟁 상대가 줄어 시장에서 유리해졌고 한솔과 공동 구매를 해 원가 절감 효과도 봤다." -종이는 사양산업 아닌가. "10여 년 전 '페이퍼리스 소사이어티(종이 없는 사회)' 얘기가 심각하게 나왔다. 일부 맞는 말이다. 종이는 크게 인쇄용지 포장용지로 구분된다. 포장용지는 큰 시장 변화가 없다. 인쇄용지는 다시 신문용지.아트지.특수지 등으로 나뉘는데 단순한 정보 전달 기능을 하는 종이는 미래가 불투명하다. 특수지도 IT의 발달로 수요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아트지의 경우는 다르다. 고급 아트지로 뽑은 사진은 질(質)이 다르지 않나! 아트지 시장은 아직 성장성이 크다. 물론 성숙 산업인 만큼 제지업계 스스로 노후설비를 정비한다거나 구조조정을 해 수익성을 높일 필요는 있다." -'포스트 페이퍼(종이 이후)' 시대를 준비해야 하지 않나. "일단 주력인 제지업을 넘버원 리더로 포지셔닝하는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트원제지 인수도 이런 맥락에서 했다. 우리가 강점을 지닌 분야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인접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할 것이다. 제지업 특성상 많이 쓰는 화학제품의 사용 범위가 넓어지면서 새 사업기회가 열리고 있다. 예컨대 과산화수소수는 요즘 반도체와 LCD 생산 공정에서도 세척용으로 쓰인다. 한솔케미칼이 이런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제지업에선 폐수.폐기물 처리 기술도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폐자원을 활용하는 노하우가 생겨 환경.엔지니어링 계열사인 한솔EME가 사업을 넓혀가고 있다." -경영 스타일이 상당히 보수적이다. "우리 기업문화가 그렇다. 반도체는 3년이면 감가상각이 끝나지만 제지는 20년 걸린다. 장치산업의 특성이다. 보수적인 경영을 할 수밖에 없다. 제지와 연관 사업에 집중하면서 남는 재원을 M&A로 돌릴 것이다. 내실이 우선이다." -한때 재계 10위권에 진입했다가 50위 밖으로 밀렸는데 다시 규모를 키우고 싶지 않나. "전혀 그런 욕심 없다. 기업을 평가하는 척도는 사이즈가 아니다. 수익성이다. 그런 점에서 자산회전율을 눈여겨본다. 외환위기 당시 한솔은 자산 11조원에 매출 4조원이었다. 자산회전율이 0.4에 불과해 심각한 재무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지금은 자산 4조원에 매출 4조5000억원이다." -가장 중시하는 경영 원칙은. "비즈니스 기본 원리다. 고객이 느끼는 가치가 상품가격보다 커야 하고 가격은 비용보다 커야 한다. 고객 가치가 가격에 미치지 못하거나 비용이 높으면 기업은 망한다. 이 원리를 충실히 지켜가면서 사업을 해야 한다." WHO? 1955년 서울생.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외손자이자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3남으로 미국 필립스 아카데미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삼성물산·모건 은행을 거쳐 87년 이후 전주제지(현 한솔제지)에서 줄곧 근무하다 2002년 회장에 취임했다. 조용하면서 신속하게 그룹 구조조정과 재도약을 이끌어왔다는 평을 듣는다. 좌우명은 ‘겸손하게 살자’. 미국 유학 시절 이 고문이 용돈을 월 50달러만 보내줘 식당 서빙·설거지를 하면서 50달러를 더 벌어쓴 게 큰 인생 경험이 됐단다. 취미는 테니스와 골프. 특히 테니스는 수준급으로 2003년부터 대한테니스협회장을 맡고 있다. 차진용.이상재 기자

2009-09-10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4] 박용만 (주) 두산 회장

오늘은 뉴욕에서 출발해 노스다코타에 가서 회의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미팅. 하루가 '완전 만땅'. 새벽부터 삽질로 힘찬 첫걸음! 으라차차차!" 지난 13일 박용만(54) ㈜두산 회장이 사회적 네트워킹 서비스(SNS)인 '트위터'에 남긴 글이다. 요즘 박 회장은 트위터에 푹 빠져 있다. '부인마마' '당빠(당연하다)' 같은 거침없는 표현에 '당근 근엄'할 것이란 선입견이 싹 달아난다. 그는 시종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이틀 전 뉴욕에서 돌아와 아직 낮밤이 바뀌지 않았다"고 인사를 했지만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위기 경영을 논할 때는 "감상적인 가치는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두산은 건재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6월 특수목적회사(SPC)를 만들어 삼화왕관.두산DST.SRS코리아.한국우주항공(KAI) 등을 매각했다. 이를 통해 7800억원대의 유동성을 확보했는데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얻었나. "1995년부터 지금까지 15년째 인수합병(M&A)을 해왔다. 그동안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더라. 나중엔 다소 낯설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까지 수용하게 된다. 이번 역시 과거 딜을 참고해 현 상황에 맞게 발상을 바꾼 것이다." -2007년 인수한 밥캣의 실적 부진으로 한때 유동성 위기설이 돌았는데. "애초부터 전혀 잘못 본 것이다. M&A와 관련해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두산이 단골로 거론됐다. 그러나 지금이니까 말하는데 우리는 다른 기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밥캣의 실적이 예상보다 부진했고 이에 따라 금융권 대출 계약 조건을 맞추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밥캣이라는 '한 계열사'의 특수하고도 일시적인 상황이었다. 이를 두산 전체의 위기로 해석한 것은 과장됐다." -소비재 사업을 대폭 정리하고 중공업 회사로 변신했다.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의 결과다. 95년 위기가 닥쳤다. 창업 100주년을 1년 앞두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론 전혀 기뻐할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엔 구조조정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는데 계열사를 매각하니 밖에서는 '얼마나 어려우면'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회사가 망하는 줄 알고 금융권의 오해도 많이 받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성장하는 과정에서 M&A라는 계단식 성장 기법을 찾았다." 95년 당시 두산은 출혈 경쟁 속 증설 투자로 유동성이 최악이었다. 그해 그룹 매출은 3조원인데 적자가 9000억원이 넘었다. 결국 박용곤 당시 회장 등 오너 일가의 결단으로 신속한 구조조정에 나서게 된다. 경영권이 없는 3M.코닥.네슬레 등의 합작사 지분 매각을 시작으로 체질 강화에 나섰다. -최근 M&A를 했다가 어려워지는 기업들이 나오고 있다. "대개는 기업의 미래 가치 산정에 실패해서 그렇다. 가치 산정 과정에 감상적 요소가 개입하면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승부욕이 앞서면 가치 이상의 금액을 적어내게 된다. 또 인수 뒤 기업의 가치 증대에 실패하거나 피인수 기업의 기존 가치를 다른 곳에 전용함으로써 지불 가격에 해당하는 기업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비싼 값을 지불한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수십 차례 M&A에서 얻은 원칙과 교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언론은 M&A 얘기가 나올 때마다 '아직도 배가 고프다' '최후의 승자' '소화불량' 같은 수사를 쓰는데 M&A는 먹고 먹히는 전쟁이 아니다. 총칼을 들이대고 강탈하지 않는 한 말이다. 한쪽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M&A는 성사되지 않는다. 서로 동일한 가치에 동의해야 한다. 이런 사고가 바탕이 돼야 서로 윈윈 할 수 있다. 두산의 M&A는 영토 확장이나 단순한 성장 욕구의 충족 과정이 아니다. 두산의 M&A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제품.기술.시장.고객 등 경영자원을 보유한 회사를 공정한 가격을 내고 인수함으로써 경영의 효율을 올리는 과정이다. M&A 원칙은 크게 네 가지다. 우선 인수 대상 기업의 자산 규모보다 미래 가치가 커야 한다. 다음은 사업 구조 개선 및 새로운 가치 창출이 가능해야 한다. 또 원천기술 등 차별화 가치를 갖고 있어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올릴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우수 인재가 많아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 박 회장은 "M&A에 공정가격은 없다"고 주장했다. "얼마에 샀느냐는 주관적인 것이다. 한국중공업을 인수할 때 주당 8350원을 써냈다. 당시 주가(3670원)에 비하면 엄청 비싼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주가가 18만원을 넘기도 했다. 인수한 뒤 추가 이익을 얼마나 낼 것인가 이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인 것이다. 100원을 쓰든 200원을 쓰든 그것은 '나'만이 가지는 가치다. 그래서 인수 이후를 예견하고 준비하는 전략적 검토가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우리도 시행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시행착오를 겪었다." -어느 딜이 가장 기억에 남나. "OB맥주 매각이다. 선대가 물려준 주력 회사라는 감상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기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상대가 조심스럽게 나온 데다 딜 자체가 워낙 복잡해 힘들었다." -보람 있었던 딜을 꼽는다면. "한국중공업 인수다. 2000년까지 계속 매각만 해오다 다시 성장으로 돌아선 첫 번째 딜이었다. 인수 이후 기업 가치가 가장 크게 증대된 사례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매물이 많이 나온 요즘이 M&A에 좋은 기회 아닌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려면 가치 있는 기업을 사야 하는데 가치 있는 기업은 위기를 잘 견뎌내기 때문에 매물로 잘 안 나온다. 나와도 너무 비싸다. 하지만 경기가 바닥을 친 이후 횡보가 지속될 경우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경제위기 돌파 노하우는. "CEO가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위기가 어떤 형태인가 얼마나 깊은가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서 지속적인 원가 절감 등을 추구해 기업 체질을 바꿔야 한다. 둘째 경기 회복의 속도와 양상이 어떠할 것인가 주시해야 한다. 교과서적인 얘기지만 경기 회복에 따른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먼저 실체를 알아야 한다. 그 다음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안이한 기대나 막연한 예상 감상적 고려를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두산이 위기 극복 과정에서 가장 잘했다고 여겨지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야 지극히 현실적이며 강력한 실행 방법이 나온다. 위기가 오면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사활을 걸고…' 같은 감정적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지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냉정하고 즉각적인 대응이다." -두산만이 보유한 경쟁력 요인은. "원칙을 지키는 환경 대응력이다. 빠르고 과감한 의사결정도 장점이다. 이제 우리는 곁눈질하지 않는다. 감상적 가치와는 이별했다. 하다 못해 창고를 지으려고 해도 땅이 없다. 부실한 자산 운용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WHO? 1955년 서울생. 고 박두병 두산 회장의 5남이다. 경기고,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보스턴대 경영대학원(MBA)에서 유학했다. 외환은행을 다니다가 82년 그룹에 합류해 동산토건·동양맥주·두산음료·동아출판사 등에서 근무했다. 지난 3월 그룹 지주회사인 두산 대표이사 회장을 맡았다. ‘햇빛발전소(solarplant)’라는 아이디로 네티즌과 트위터를 즐기고, 사내 직원과 메신저로 ‘번개 미팅’을 하는 등 소통을 중요시한다. 취미도 다양해 사진과 걷기, 수영을 두루 즐긴다. 짬짬이 ‘미드(미국 드라마)’와 개그 프로그램도 즐겨 본다. 차진용.이상재 기자

2009-09-03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3] 김영달 아이디스 시장

일반인들에게는 조금 낯선 이름이지만 영상보안 업계에서 '아이디스'는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에 비견된다. 이 회사는 폐쇄회로TV(CCTV)를 업그레이드한 디지털 영상보안장치(DVR) 분야에서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GE) 영국 데디케이티드마이크로스(DM)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일본의 소니.미쓰비시 등을 한 계단 아래로 밀어냈다. 1997년 창업해 12년 만에 이룬 성과다. 독일 출신의 세계적 경영학자 헤르몬 지몬이 말한 '히든 챔피언(숨은 강소기업)'이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다. 무협지 같은 화려한 성공 스토리가 있을 법도 했다. 그러나 서울 삼성동 사무실에서 만난 김영달(41) 사장은 "특별한 위기는 없었다"며 엷게 웃었다. -지난해 매출이 812억원인데 올 상반기는 358억원에 그쳤다. 10여 년간 매출 성장률이 20%가 넘었는데 올들어 성장세가 조금 꺾였다. "(크게 웃으면서) 한대 맞았다.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수출에 브레이크가 걸렸다(이 회사는 전체 매출에서 수출 비중이 90%에 이른다). 그러나 영업이익률은 아직도 20%가 넘는다. 정확히는 24%다. 회사의 체력은 더 좋아졌다. 특히 7~8월 들어 주문량이 늘고 있다. 전체 매출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영상보안장치는 계속 성장하는 분야다. 어려운 시기를 경쟁사를 제칠 호기로 여기고 있다." -DVR 시장은 업체들의 부침이 극심한 분야다. 이 업계에서 살아남은 비결이라면. "서로 지향하는 시장이 달랐다. 우리는 제조 경쟁력이 아니라 기술 경쟁력으로 밀고 나갔다. 처음부터 프리미엄 마켓(고급제품 시장)에 들어갔다. 경쟁 제품보다 적게는 20% 많게는 3배 정도 비싸지만 우리 제품만 찾는 바이어가 많다. 값싼 제품으로 승부를 걸려 했다면 벌써 중국.대만 업체한테 뒷덜미를 물렸을 것이다." -아이디스 제품은 무엇이 다른가. "DVR은 24시간 365일 안정적으로 가동돼야 한다.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서버 같은 것이다. 한번은 세븐럭 카지노에서 DVR 입찰을 부치면서 테스트만 6개월을 하더라. 우리 제품만 합격 판정을 받았다. 세계 시장에서도 이런 식으로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창업 초기부터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나 뉴욕 지하철 호주 시드니 올림픽 주경기장 등에 설치될 수 있었다." -경쟁사들이 하나같이 쟁쟁한 글로벌 기업이다. 한국의 조그만 벤처업체라 견제를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웃으면서) 글쎄 특별한 기억이 없다. 기술이 워낙 탁월했다." 김 사장은 몇번이나 "사실이 그렇다"고 강조했다. KAIST 전산학과 박사과정으로 있던 그가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미국 연수를 다녀오면서부터. 지도교수 추천으로 95년부터 1년간 실리콘 밸리에 다녀왔는데 그곳 벤처기업들의 역동성에 감탄해 창업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귀국 뒤 창업할 동료를 구했는데 모두 네명이 모였다"며 "정진호 연구소장 류병순 미국 지사장 등이 지금도 함께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디로 갈지(사업 아이템)보다 '버스에 태울 사람'을 먼저 결정한 셈이다. "그렇다. 창업 동지 다섯명이 모여 내내 사업거리를 궁리했다. 화상회의 시스템 바이오 기술 인공지능 인식 등 수십 가지 아이템을 놓고 저울질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CCTV였다. '녹화 화면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아두는 것보다 PC에 저장하면 훨씬 쉽게 검색하고 재생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비즈니스로 연결한 것이다. 정식으로 회사를 차리기 전 꼬박 1년을 그렇게 궁리하면서 지냈다. 지나고 보니 보약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내로라하는 과학 영재들이 CCTV 사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미지근했다. 모교 교수들조차 "조금 더 때깔 나는 사업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김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실리콘 밸리에서 배운 창업 메시지는 분명했다. '▷세계 시장에서 1등을 할 수 있는 기술이어야 한다 ▷대기업이 뛰어들지 않았거나 주력하지 않는 분야를 노린다 ▷새로운 시장 개척보다는 기존 시장을 대체할 신(新)병기로 승부한다'는 것이었다. 요새 말로 '히든 챔피언'이 되겠다는 것이다." 화려한 비즈니스는 아니지만 DVR이 여기에 딱 맞아떨어졌다. GE.소니.지멘스 같은 글로벌 기업이 보안장비를 출시하고 있었지만 비주력 사업이다 보니 아이디스로서는 승산이 있었다. 영상보안장비 시장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이나 게임처럼 '무모한 도전'도 아니었다. 또 아날로그 장비가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신규 진입자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요컨대 시장은 존재하는데 새 기술로 새 판을 짤 수 있다는 얘기였다. 김 사장은 "목표가 분명한 데다 사업 아이템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렇다 할 위기가 없었다"고 말했다. -제품 개발은 어떻게 했나. "철저하게 고객 위주로 했다. 대학원 시절 우리는 전세계 최고.최신의 정보기술을 배웠다고 자부한다. 그런 것에 비하면 DVR은 폼 안 나는 사업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동차 기술로 자전거를 만드는 중'이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이럴 때 네발 자전거를 만들면 망한다. 대신 엔진을 단 자전거로 특화해야 한다. 회사를 설립하고 8개월 동안 골방에 파묻혀서 연구한 끝에 'IDR-1016'을 내놓았다. 업계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엄지손가락을 쳐들더라. 성공을 확신했다." -그래도 시장과 소통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고객의 요구를 따르다 보니 저절로 됐다. 창업 초 미국 전시회에 나갔는데 한 바이어가 '우리 직원은 중졸 학력의 흑인이 대부분이다. 마우스 더블 클릭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이렇게 복잡한 기계를 어떻게 만지느냐'고 핀잔을 주더라. 곧바로 손쉽게 조작할 수 있는 제품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회사 몸값이 높아졌다." -'위기 이후'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과거 10년간 DVR에 집중했다. 시장 점유율도 탄탄해졌다. 순수 투자 여력도 1400억원에 이른다. 이제는 보안장비 업계의 세계적 리더가 되는 것을 노려볼 만하다. 보급형 제품으로 라인업을 수직화하고 보안카메라나 출입통제 시스템 같은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2005년 말엔 보안카드 프린터 전문회사인 아이앤에이시스템을 인수했다. 창업 20주년인 2017년 매출 1조원을 달성하는 게 중기 목표다." -벤처기업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창업에 도전한다는 데는 찬성이다. 다만 꿈을 너무 높게 잡아선 곤란하다. 목표는 두발로 점프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하지 구름 속에 있어선 곤란하다. 사업 한 방에 빌 게이츠처럼 될 수 있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다음 인터뷰 대상자를 추천해 달라. "박용만 두산 회장을 추천한다. 90년대 후반 두산 구조조정을 지휘한 것이나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건재함을 과시한 것이나 위기관리 하면 박 회장이 '달인' 아닌가 싶다." ■ 김영달은 누구 1968년 대구생. KAIST 전산학과 87학번으로 같은 대학에서 9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정주 넥슨 사장이 동기생이다. 대학 시절 수억원대 소프트웨어 개발 용역을 맡으면서 ‘부르주아 학생’으로 불렸단다. 온화한 인상이지만 집념이 대단해 될 만한 사업 아이템을 찾는 데만 1년을 투자하기도 했다. 97년 9월 아이디스를 설립해 12년 만에 매출 800억원대 글로벌 벤처기업으로 일궜다. 연구인력 100여명을 포함해 전체 임직원은 230여명에 이른다. ■ 디지털영상보안장치(DVR) 보안용 감시카메라가 촬영한 화면을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하는 영상 감시장비. 기존의 테이프 저장방식보다 화질이 선명하고 검색 복원 기능이 뛰어나다. 화면 전송도 할 수 있어 원격 관리가 가능하고 보안 시스템 전체를 통합 운영할 수 있다. 이상재 기자

2009-08-27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2] 이희자 루펜리 사장

"위기는 올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오게 돼 있다. (위기를) 피해갈 수 없다면 정면 돌파하는 것이 상책이다." 음식물 처리기 '루펜'으로 유명한 이희자(55) 루펜리 사장은 위기관리의 첫째 수칙을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인물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도전정신으로 기업을 일군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란다. 음식물 처리기 사업이 안정궤도에 올라서나 싶더니 토목자재 사업에 진출하면서 더욱 바빠진 이 사장을 만났다.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추천을 받았다. 어떤 인연이 있나. "3년 전 음식물 처리기 수출 건으로 두바이에 출장 갔을 때 처음 만났다. 이후 행사장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다. 지난달엔 이명박 대통령의 폴란드 국빈 방문 때 현지에서 열린 한국상품전에 출품만 하고 참석하지 못했는데 손 회장이 루펜리 부스를 찾은 대통령에게 제품 설명을 자세히 해줬다. (당시 현장 사진을 보여 주면서) 상의 회장으로서 중소기업 제품까지 세심히 배려하는 것을 보고 감동받았다." -음식물 처리기 '루펜'을 2003년 처음 선보인 뒤 승승장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80여만 대 팔렸다(아파트 빌트인 포함). 시장 점유율이 70%가 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다. 음식물 처리기 사용 가정이 한국의 1400만 가구 중 5% 남짓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면서 위기는 없었나. "처음부터 위기였다. 사업 초기인 2003년 말 판로를 고민하고 있던 차에 한 대기업이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납품해 달라고 제안해 왔다. 그 회사에만 공급한다는 조건으로 계약했다. 그런데 차일피일 납품시기를 미루더라.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알고 보니 자체적으로 음식물 처리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나중에 일방적으로 해약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소송할 기력도 없었다. 대기업이 그걸 노린 것 같더라. 이때 나타난 '천사'가 가구회사 보루네오였다. 이 회사가 부엌가구 사업에 진출하면서 음식물 처리기를 빌트인으로 집어넣기로 한 것이다. 이 때는 '먼저 제품을 가져가야 계약한다' 해서 단번에 1만 대를 납품할 수 있었다." 그는 사업 초기 아픈 추억 때문에 OEM 납품은 의뢰가 들어와도 거절하고 있다. 자기 브랜드를 고집한 덕분에 루펜의 브랜드 가치가 450억원 정도로 평가받는다고 했다. -이젠 경쟁사가 꽤 늘었다. "한때 음식물 처리기 업체가 40개나 난립했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음식물 처리기만큼은 경쟁사 걱정을 크게 하지 않는다. 10년을 연구해 쓰레기 악취를 잡았는데 남들이 베낀다고 해서 금방 따라올 수 없다. 우리 제품은 모두 한국에서 만든다. 좀 비싸더라도 품질을 생각해서다." 지금은 여유 있게 말하지만 지난해 경쟁 제품이 쏟아지면서 이 사장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단다. 특히 후배 여성 기업인과 경쟁하면서 꽤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한 대기업이 내놓은 제품은 분쇄 건조 방식이어서 속으로 안심했다. 과거 개발 단계에서 실패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방식으론 악취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난해 봄에 여성 기업인이 경영하는 A업체에서 경쟁 제품을 내놓았을 때는 긴장했다. '이틀 뒤 한 TV홈쇼핑에서 A사가 음식물 처리기를 우리 제품의 절반 수준 가격으로 판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경쟁 홈쇼핑회사에 연락해 '19만8000원에 팔던 제품을 보급형 모델로 전환해 9만9000원에 팔 테니 다음날 방송을 잡아 달라'고 제의했다. 다음날 1시간 만에 6000대가 매진됐다. 이익을 생각 않고 가격 인하를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손해를 봤다." -지난해 여름엔 한 TV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에서 '전기요금이 많이 나오고 악취가 심하다'고 보도해 음식물 처리기가 도마에 올랐다. "방송이 나간 다음 날 40명 임직원이 모두 비상대기하고 있었는데 6통의 전화가 온 것으로 끝이었다. 반품 신청이 한 대도 없었다. 오히려 제품력을 검증받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음식물 처리기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나빠지면서 추석 대목을 앞두고 만들어 놓은 5만 대의 판로가 막혀 버렸다. 이를 타개할 방법은 수출 밖에 없었다. 이 사장은 일본.영국.대만.아일랜드.태국 등 해외를 돌아다니며 수출 확대에 적극 나섰다. 한국 내에서 싸우느니 해외에서 인정받겠다는 생각에서다. 덕분에 지금은 일본에서 야마다전기.빅카메라 등 대형 가전판매점과 QVC홈쇼핑의 판로를 확보했다. 다만 루펜리의 수출 비중은 아직 10%가 채 안 된다. 이 사장은 원래 평범한 주부였다. 그가 사업가로 나선 것은 외환위기 때 남편 회사가 부도났기 때문이다. '운명을 디자인하는 여자'란 책을 읽고 용기를 얻어 49세 늦깎이로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이 사장은 음식물 처리기의 성공에 힘입어 가습기.제습기 등 소형 가전제품을 만드는 리빙엔과 루펜큐를 잇따라 설립했다. 이 사장은 폴리카블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올해 세 회사의 총 매출 목표를 1000억원대로 잡고 있다. -향후 목표는. "5년 안에 1조원 매출을 올리는 게 목표다. 사업을 시작했으니 조 단위 기업은 해 봐야 하지 않겠나. 토목자재 사업이 발판이 될 것이다. 이미 2000억원 넘게 수주했다." -다음에 인터뷰할 CEO를 추천해 달라. "영상보안장비를 만드는 아이디스의 김영달 사장을 추천한다. 함께 벤처산업협회 일을 하면서 알게 됐는데 유머 감각도 좋고 특히 도전정신이 돋보이는 분이더라." WHO? 1954년 강원도 원주생. 원주여고를 나와 7년여동안 한국신탁은행(현 하나은행)에 근무했다. 결혼 후 주부로 지내다 2003년 49세 때 루펜리를 설립해 음식물 처리기를 선보였다. 이후 자회사로 소형 가전제품업체 '리빙엔'과 토목자재업체 '루펜큐'를 세우며 사업을 확장했다. 발명의 날 국무총리상(2006) 제네바 국제 발명전 여성 발명가상(2008)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벤처산업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남편인 성낙국 삼오프레스 대표와 2남1녀를 두고 있다. 차진용.이상재 기자

2009-08-20

[최고 경영자 릴레이 인터뷰-1] 손경식 대한상의·CJ 회장

그러나 남다른 지혜와 철학으로 위기에 대응하며 위기 이후를 대비하는 CEO들도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시대에 한국 대표 CEO들의 지혜를 듣기 위한 '릴레이 인터뷰'를 마련했다. 첫 순서로 대한상공회의소와 CJ그룹을 이끌고 있는 손경식(70) 회장을 만났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많은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럴 때 CEO는 무엇에 가장 신경 써야 하나. "기본적으로 닥쳐오는 위기에 잘 대처해야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경제 패러다임이 빠른 속도로 바뀌어 가고 있다. 종전 방식에 안주하면 언젠가 2류로 떨어진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남이 생각하지 못한 사업과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력이다. 창의적인 조직을 만드는 게 급선무다." 손 회장이 이재현 회장과 공동 경영하는 CJ그룹은 재계 순위 19위로 식품을 주력으로 유통.생명공학.미디어.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이재현 회장은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의 장손이다. CJ의 모태는 1953년 설탕 생산업체로 설립한 제일제당으로 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됐다. 2002년엔 회사 명칭을 설탕.조미료 등을 연상시키는 '제일제당' 대신 영문 약자인 'CJ'로 바꿨다. 지난해 말 총자산은 12조3240억원에 달한다. -CJ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창의적 조직 문화가 창의적 아이디어를 만든다. 분위기가 딱딱하면 좋은 아이디어를 내기가 쉽지 않다. 이재현 회장이 창의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복장도 자율화하고 출퇴근 시간도 융통성을 두고 있다. 조직도 부장.차장.과장 직급 체제가 아닌 기능 중심으로 개편했다." 손 회장은 인터뷰 중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창의'를 강조했다. "경쟁력의 요체는 창의력"이란 설명이었다. "한국 경제 전체로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선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CJ는 식품 기업 이미지가 강하다. 새 사업 발굴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나. "더뎌 보여도 착실히 한 발 두 발 나아가고 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많이 바뀌었다. 우선 홈쇼핑이란 새로운 영역에 진출했다. 중국에서 두 개의 합작 홈쇼핑 방송을 만들었고 다른 나라에도 넓혀 가려 한다. 미디어 산업에도 진출했고 물류.게임사업도 하고 있다. 식품 외에 사업 다각화를 많이 했고 (비식품 부문의) 비중도 커졌다." -기업 인수합병(M&A)을 할 때 원칙이 있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가치평가(valuation)다. 가격 결정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너무 비싼 값을 주면 자금 조달도 어렵고 수익성을 맞추기도 힘들다. 그동안 (경영권) 프리미엄이 너무 비싸지 않았나 생각한다. M&A를 하려는 목적도 분명해야 한다. 해당 사업에 진출할 필요가 있는지 원하는 시너지(상승 효과)와 기술을 얻을 수 있는지 확실히 따져봐야 한다." CJ는 현재 계열사인 CJ오쇼핑을 통해 케이블.위성방송 사업자인 온미디어의 인수를 추진 중이다. 그러나 가격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2년째 CEO를 맡아 오고 있다.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이며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나. "1998년 외환위기 때다. 지나치게 걱정하는 바람에 너무 세게 구조조정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철저한 현금 중시 경영을 했다. 그렇지만 위기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위기 이후 사업 전개에 대해서도 준비를 했다." CJ는 연간 10억 달러 규모의 곡물 수입을 하는데 외환위기 당시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곡물 수입이 사실상 막히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고금리와 고환율로 어려움이 가중되자 손 회장은 '현금 중시 경영'으로 위기를 헤쳐 나갔다. 덕분에 위기 이후에는 넉넉한 현금으로 공격적 투자와 M&A에 나설 수 있었다. 2000년 삼구쇼핑(현 CJ오쇼핑)을 사들인 것을 비롯해 삼양유지사료(2002년).신동방(2004년).해찬들(2005년).하선정종합식품(2006년) 등을 인수했다. 그러면서 생수.음료사업과 드림라인을 매각했고 지난해는 CJ투자증권을 현대미포조선에 넘겼다. -쌍용자동차가 심각한 노사 분규를 겪고 있다. 노사 관계 안정을 위한 CEO의 역할은 무엇인가. "CEO는 투명한 경영을 하고 근로자들에게 긍정적 인식을 심어 줘야 한다. 경영 내용에 대해서도 가급적 공유하는 게 좋다. 동시에 '무노동 무임금' 같은 원칙에선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 CJ는 사원들과 어떠한 문제도 토론할 수 있도록 대화의 광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현 정부가 노사 분규에 대해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려는 것은 매우 잘하는 일이다." -고희의 나이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건강 관리의 비결은. "의사가 체중을 줄이라고 해서 73㎏에서 68.5㎏으로 줄였다. 한두 달 사이에 4㎏ 이상 뺀 것이다. 식사를 조절하고 운동을 빼먹지 않고 한다. 체육관에서 자전거를 탄다. 한 번 운동에 170㎈를 소비하는데 시간이 37~38분 걸린다." -다음 '릴레이 인터뷰' CEO를 추천해 달라. "루펜리의 이희자 사장이 좋을 것 같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음식물쓰레기 처리기를 만들어 시장에서 성공한 기업인이다. 요즘은 여성이 벤처기업을 많이 하는데 참 좋은 일이다. 여성의 능력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WHO? 1939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경기고 2학년을 다니던 57년 서울대 법학과에 합격한 '수재'다. 61년 대학 졸업 후 한일은행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오클라호마주립대 경영학석사(MBA)를 마쳤다. 68년 귀국해 삼성 회장 비서실에서 삼성전자 설립에 기여했다. 73년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이사로 옮긴 뒤 77년 38세의 나이로 대표이사 사장에 임명됐다. 93년 CJ(당시 제일제당)가 삼성으로부터 '경영 독립'하면서 CJ 부회장을 맡았고 95년 CJ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2005년 11월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이 중도 사퇴하자 대신 회장직을 맡았다. 올 3월 3년 임기의 대한상의 회장에 재선임됐다. 32년 동안 CEO를 역임해 누구보다 기업 경영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고 식견이 탁월한 것으로 정평 나 있다. 손 회장은 이재현 CJ 회장의 외삼촌이다. 차진용.주정완 기자

2009-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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